'역덕후가 풀어쓴 일본의 리더십'을 시작하며
나는 고등학교 시절 반에 한두 명 정도 있을 법한 역덕후(역사 오타쿠)였다. 왜 교실 구석에서 혼자 앉아 발해 왕 순서까지 줄줄 외우곤 내심 뿌듯해하는 그런 이상한 애가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비록 대학에 가서는 전공으로 영문학을 선택했지만, 역덕후의 기질만은 여전했던 터라 매 학기 역사 수업 하나는 반드시 신청해 들었다. 나로서는 공부가 하기 싫을 때 도피처를 마련하고 싶은 심리였던 것 같다. 그렇게 4년 동안 들은 역사 수업이 한국, 일본, 중국, 영국, 미국 지역을 가리지 않았으니, 지금 돌이켜보면 전공으로 신청하지 않았던 게 도리어 미련한 선택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수많은 나라의 역사 중에 가장 많이 기웃거렸던 지역이 일본이었다. 일본사에 관심이 생겼던 건 고등학교에서 한국사, 특히 근현대사를 공부하며 중요한 장면마다 어딘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보통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메이지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 정부에 무력시위를 하며 강화도 조약을 비준하였다
이때 나는 바로 옆 동네에 사는 재네(일본)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한테 포를 쏘아댈 만큼 입장이 다른지 무척 궁금했다. 지금이야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생겼다지만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이 점을 명쾌하게 알려주는 수업이 없었다.
그런 궁금증을 본격적으로 해소하게 된 계기는 박훈 교수님의 '일본의 인물과 역사'라는 수업이었다. 교수님께서는 약간 툴툴대시며 아주 쿨(?)하게 수업을 하시는 편이었는데, 나는 그런 모습이 어쩐지 소탈한 학자의 풍모인 것만 같아 경외감을 가득 품게 되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수업을 듣다 보니 이 수업에서 만큼은 '진짜 열심인 공부'를 하게 되었다. 전공 소설 리딩은 반도 못해가는 날이 태반이었지만 일본사 수업은 참고 서적까지 모두 읽었다. 이토 히로부미처럼 유명한 인물에 대해 다루는 날이면 일본어 원서까지 꺼내 들고 샅샅이 탐구해갔음은 물론이다. 당시 교수님께서 '너는 전공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집착하느냐'고 물으셨던 걸 보면 비어있는 지식을 채워가는 재미에 흠뻑 취해있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생긴 흥미로 인해 나는 도쿄 대학교에 짧은 교환학생을 다녀오기도 했고, 일본인 학생회 활동을 하기도 했다. 더불어 게이오대 학생들이 어학연수를 올 때면 한국어 조교로 여러 차례 역사 토론 활동을 하며 이웃 나라에 대한 지평을 넓혀왔다. 꾸준히 일본 역사책들을 읽어왔음은 물론이다.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 것은 저 옆의 나라가 지금의 강국이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인물들의 뒷 이야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명과 암을 정확히 구별하고 장점만큼은 추려서 배우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 의미 있는 작업으로 느껴졌다. 단순한 흥미로 시작한 '역덕' 생활이었지만 이제는 이웃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나의 사고방식을 이루는 중요한 틀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CSV(공유 가치 창출) 스타트업은 표면적으로 일본의 역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 하지만 역사 속 인물들이 판단했던 준거가 매번 불확실한 상황을 해결하고 있는 내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었다. 특히 시대를 이끌어온 리더들의 뒷이야기는 그들의 인간적인 고민과 결단을 손에 잡히게 그려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장면들에서 큰 도움을 받았고 그것을 글로 남겨놓고 싶었다. 이 일은 나에게는 좋은 기록이 될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즐거운 읽을거리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본격적으로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그 가치를 생활에서 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앞으로 가장 쉽고 재미있게 일본사 속 리더들의 숨소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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