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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Nov 13. 2018

영문학 그거 배워서 어디다 쓰냐구요?

글쎄요. 그것도 한번 더 생각해볼게요.


어떤 전공 하셨어요?

사회라는' 미지의 신대륙'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을 만나는 순간이면 '전공이 뭐냐'고 묻는 것만큼 경제적인 질문도 없다. 이 질문은  '당신이 관심이 있어서 선택하셨고, 미우나 고우나 4년 동안 동고동락했으며, 지금의 당신에게 도란도란 남아있는 추억은 어떤 것이냐?'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세상 사람들 모두 이런 통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인지, 나도 한달에 세네번 정도는 저런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런 순간에 하는 나의 답변은 조금 부끄럽지만 자랑하는 느낌으로 '제 전공은 영문학이에요'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대답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와 그럼 영어 대박 잘하시겠네요'라는 호들갑이고(슬픈 부담감), 다른 하나는 '보통 회사에는 경영,경제 전공이 제일 많은데 상당히 드문 전공을 하셨네요'라는 놀라움이다. (실제로 우리 회사 입사동기 80명 중에 영문학 전공자는 나 한 명뿐이다) 하지만 이런 두가지 반응의 밑바닥에 깔린 공통된 생각을 뽑아내자면 그것은 '영문학이란건 도대체 어떤 쓸모가 있느냐'라는 순전한 호기심 또는 의문일 것이다. 실제로 아주 드물긴 하지만 '그런거 배워서 어디다 쓰냐'고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분들도 계셨다.


영문과 학생들의 애증어린 동반자 노튼 앤솔로지(속칭: 벽돌)


그런 경우에는 '사진기는 사진 찍는, 샤워기는 샤워 하는 씁니다' 처럼 명쾌한 답변을 드릴 수는 없다. 솔직히 문학이 쓸모가 있어서 배웠다기보다는 좋아서 배웠던 것인지라, 갑자기 쓸모에 대해서 물어보기 시작하면 말문이 막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거진 8년 간 수차례 저런 질문을 받으면서 나름대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문학'을 배웠던 것은 일상에서 도움이 되는 점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오랜 시간 대화가 가능한 경우, '영문학 전공은 무엇이든 한번 더 생각해 보는 자세를 길러준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이런 생각을 시작하게 되었던건 영문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였다. 당시 미국 문학을 전공하신 학과장 선생님께서는 새내기 환영사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안녕하세요. 영어영문학과 신입생 여러분, 학과장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영문학을 전공하겠다고 마음 먹은 여러분의 용기에 존경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보냅니다.

····(중략)·····

저는 여기 계신 모든 신입생들이 대학원을 가고, 영어학자 혹은 영문학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사회에 나가서 다양한 일을 하며 더 넓은 세상을 보십시오. 다만 오늘 여러분의 선생으로서 한가지만 당부 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4년간 영어영문학을 공부하며 이것 하나만큼은 배워나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본질은 여러 겹의 껍질 밑에 숨어 있습니다. 정말 간단하고 단순해 보이는 현상도 실상은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앞으로 4년 동안 열심히 읽고, 쓰고, 생각하면서 본질을 보는 힘을 길러 주십시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도 아니고 '딱 한꺼플만 더 본질을 보는 사람'이 된다면 여러분은 앞으로 무슨일을 하든 우리 과에서 공부했던 것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겁니다.

지금도 이 이야기가 기억 속이 생생한건 첫째는 당시로서는 저 말씀이 도통 무슨 뜻인지 무척 알쏭달쏭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저 말씀의 의미에 여러차례 공감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문학 수업시간에 배우는 모든 커리큘럼은 '읽고, 쓰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영어학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아서 어학 관련 내용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반성)) 그러기 위해서 영문과 수업은 크게 '리딩', '페이퍼', '토론'이라는 세가지 과정을 따라간다. '리딩'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읽어오라는 것이고, '페이퍼'는 내가 읽은 부분에 대해 '나만의 생각'을 꼼꼼히 써보는 것이다. '토론'은 그렇게 생각한 것에 대해 1시간 반 동안 교수님 그리고 주변 친구들과 토론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들어 영문과생들이 보통 2학년 때 읽는 '주홍글자' (The Scarlet Letter) 수업은 이렇게 진행된다. (최근에는 주홍글씨가 아니라 주홍글자로 번역한다.) 이미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겠지만 주홍글자의 줄거리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간통을 저지른 '여인'과 '목사', 그리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 여인의 '전남편'이 한 마을에서 마주치며 벌어지는 속죄의 아침드라마가 골자다. 이렇게만 들으면 소설이 '사랑과 전쟁'의 시조 격으로 느껴지지만 막상 읽어보면 인물 간의 관계, 그리고 그들 내면에 요동치는 양심의 레슬링이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보통 수업이 시작되면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한 학생이 '목사는 위선자에요, 전남편의 복수는 당연합니다'라며 포문을 연다. 그러면 교수님께서는 무척 흥미롭다는듯이 '왜 그렇게 생각했니?'라고 천천히 물어보신다. 이제 의견을 낸 학생은 자신이 읽었던 소설의 문장들을 인용하며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공표한다. 그러면 이때 나를 포함한 삐딱한 인간들이 손을 들고 '저는 좀 아닌거 같은데요, 반대로 생각해 볼수도 있지 않나요?'라며 말대꾸를 시작하게 된다. 책의 다른 구절들을 구구절절 읊어주면서 말이다. 그렇게 1시간 반동안 갑론을박하다가 수업이 끝나면, 다음 시간에는 동일한 주제로 서로 짧은 페이퍼를 써오고 비슷한 실랑이를 쭉 이어간다.


주홍글자(Adultry)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 헤스더


영문과 학생은 것과 동일한 과정을 디킨스, 포, 울프처럼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매학기 반복한다. 이를 통해 꼬꼬마 영문과생이 깨닫게 되는것은 '세상에 무엇이든 절대적인 것은 없다', '꼼꼼히 뜯어보면 각자의 사정이 있다', '읽고 또 읽으며 생각하다 보면 늘 새로운 본질이 보인다'는 것들이다. 실제로 30년 동안 연구만 하신 교수님조차 '나는 지금까지 이 책을 20번이 넘게 읽고 심지어 논문까지 썼었는데, 이번 학기에 또 읽으니 또 새롭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것을 보면 과연 이 '본질 발굴 작업'에 끝이란게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렇지만 이렇게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으며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때때로 본질에 접근한 '나만의 시야'라는 것이 생기곤 한다. 그렇게 떠진 새로운 눈은 그 뒤로 내 가치관의 일부가 되어 매일, 매순간 나의 판단에 도움을 준다. 가령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난 뒤에 누군가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을 때마다 '그 사람도 개츠비처럼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지 몰라'라며 이해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새로운 시야라고 할 것이다. 작품을 읽은 뒤 시간이 한참 흐르면 소설의 줄거리나 등장인물, 심지어는 주인공의 이름까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이렇게 얻은 시야 만큼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꼬꼬마가 더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준다.


몇번씩 읽었는데도 가끔씩 꺼내서 읽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기분이다


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에 와서 누군가 '그래서 이제는 한꺼플 아래를 보는 눈을 기르셨나요?'라고 물어본다면 불행히도 '아직 아닌 것 같네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그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은 것 같고, 나 같은 사람이 앞으로 계속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런 눈이 생길까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4년 동안 나는 '한꺼플 아래를 보려는 자세'만큼은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때로 일을 할 때마다 '한번만 더 생각해 봐야할 것 같아요.',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무리일 것 같은데요', '좀 더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말을 강박에 시달리듯 해야 한다. 그런 순간들이면 내가 영문학을 '쓴다'는 것은 사실 별다른 기술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마음가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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