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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May 03. 2019

을지로에 존재하는 2개의 세계

당신이 어떻게 이 세계에 들어왔죠?


을지로에는 2개의 세계가 있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 하나가 살금-살금 숨어 있다. 이런 말을 하고 보니 어벤저스가 만든 평행 우주나 해리포터가 지나친 9와 3/4 승강장이 번뜩 떠오르지만 글쎄, 그렇게 낭만적인 친구들은 원래 영화나 소설 속에만 있는 법이다. 을지로에 공존하는 2개의 세계란 정말 우리 눈앞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 바로 '직장인 월드'와 '노숙자 월드'다


회사를 처음 들어갔을 때, 그러니까 한 500일 전쯤, '을지로에는 노숙자가 참 많구나' 생각했었다. 지하철 입구에는 어김없이 박스가 널브러져 있었고,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들이 하릴없이 주무시는 모습이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때때로 그분들은 긴장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하셨는데, 뭐가 그렇게 불안하셨던 걸까. 사대문 안 풍경이 생경했던 나에게 우직한 고층 빌딩과 움츠러든 노숙자의 조합은 꽤나 이질적으로 보였다.


그렇게 회사를 다닌 지 이제 1년,  한동안 그분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그새 구청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여 노숙자들을 다 옮겨간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무렵이었다. 하루는 선배 한분이 커피를 마시자며 나와 동기들을 카페로 이끌었다. 회사 밑에 있는 아주 깨끗한 카페였는데, 옆자리에 있는 스타벅스와는 달리 조금은 한적하고 그래서 쾌적한 샌드위치 집이었다. 선배와 우리들은 청포도 에이드를 시켜놓고 하하호호 청록색 수다를 떨고 있던 와중, 남루한 모습의 아저씨 한분이 샌드위치 선반 앞에 들어섰다.


아저씨는 행색이 참 이상했다. 중국인 관광객처럼 알록달록한 옷을 입었는데, 뒷머리는 잔뜩 까치집을 지은 상태, 표정은 평안해 보이는데, 눈에는 생기가 없는, 그런 조금 이상한 상태였다. 그때 우리 일행은 얼굴은 서로에게, 눈은 모두 아저씨에게 향해 있었는데, 누구도 감히 저 아저씨가 노숙자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무슨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런 사람은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저씨는 샌드위치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더니, 제일 크고 두툼해 보이는 샌드위치 하나를 집었다. 그리곤 후다닥 카페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간적으로 나와 함께 있던 모두는 '내가 지금 뭘 본거지' 싶어 서로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이렇게 천연덕스러운 도둑질의 현장이라니. 샤워하고 나오는데 교장선생님을 마주치는 것처럼 정말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잔뜩 당황한 우리는 카페 주인인 사장님을 쳐다봤다. '사장님 저.. 저 아저씨가 샌드위치를 들고 튀었어요! 어떡하죠? 아세요?' 뭔가 사장님이 쏜살같이 달려 나가 이 사태를 해결하길 바라듯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사장님이 말했다. '알아요. 이 근처 노숙자 많잖아요. 계속 보고 있었어요. 뭐 어쩔 수 없죠.' 앞치마를 펄럭이던 사장님은 선반을 다시 깔끔히 정리하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카운터로 돌아가셨다.


포토샵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그림 한 장에는 레이어 위에, 레이어 위에, 또 레이어가 셀 수없이 덧대져 모든 장면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편집하는 사람은 자기가 보기 싫은 레이어에 검은 마스크를 씌운 뒤, 보고 싶은 레이어만 본다는 것을. 을지로에는 노숙자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1년간 여기서 지낸 내가 마스크를 꽁꽁 씌워 놓은 것일 뿐.


그날 노숙자 아저씨 한분이 내 마스크를 찢고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비로소 가려졌던 다른 세계 하나가 빼꼼 보였다. 그 세계도 늘 나와 함께 여기 존재했던 세계였겠지, 그리고 이 세계 말고도 3번째 , 4번째 세계가 계속 있겠지 하는 생각을 던지면서 말이다. 오늘도 보이지 않지만 나와 함께 있을 수많은 세계를 생각하면 내 좁은 시야가 참 답답하게 느껴진다. 정말 세상은 신경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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