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항복으로 일본을 지켜낸 가쓰 가이슈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예전에 한 인문학 연구소에서 면접을 볼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그 연구소는 꽤나 고상한(?) 면접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요. '면접 대상자가 최근에 관심이 많은 역사적인 사건을 영어로 토론해보는 것'이 인터뷰의 핵심이었습니다. 영어 울렁증이 있는 저로서는 그냥 영어만 하래도 어려울 텐데, 영어로 역사까지 설명하라니요. 나이 지긋한 미국인 교수님의 질문을 받자마자 '이게 무슨 상황이야..??' 하며 눈꺼풀만 끔뻑끔뻑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제가 적어 냈던 주제가 '메이지 유신'이었습니다. 그냥 관심사를 적는 건 줄 알고 대충 써서 냈다가 된통 뒤통수를 맞은 저는 아직도 그날의 면접을 생각하면 등허리가 찌릿찌릿합니다. 그때는 '메이지 유신'에서 유신이라는 말이 영어로 무슨 단어를 쓰는지조차 몰랐거든요.(답은 Meiji Restoration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그때 제가 드렸던 답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당시의 저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음.. 정말 재미있는 질문이네요.(진땀) 하지만 당신도 이미 알고 있듯이, 그렇게 거대한 역사를 하나의 이유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여유) 그래서 오늘 저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라며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번뜩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가쓰 가이슈입니다.
그리고 저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당신은 혹시 도쿄가 폐허가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저는 오늘 그런 끔찍한 참사를 막고 모든 일본 사람이 근대화에 동참하는 계기를 준 사건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때는 1868년 1월 겨울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왠 독일 상인 하나가 장사를 못하게 한다며 고종의 할아버지 무덤을 파헤쳐버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 오랑캐는 모조리 죽이겠다며 길길이 화를 내시던 그때, 옆 나라 일본은 정말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한창이었지요.
그때 일본은 서양인과 싸우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같은 일본 사람끼리 사생결단을 내고 있었는데요. 혼돈의 시대가 늘 그렇듯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와 새로운 도전자가 얽혀 전장에서 피 튀기는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쪽은 바로 250년 동안 일본을 통치해온 에도(현재 도쿄)의 쇼군이었고 다른 한쪽은 일본의 명목상 황제였던 교토의 천황(일왕)이었습니다. 변화하는 국제정세에서 쇼군이 늘 나약한 자세로 일관하자 일본 서쪽 지방의 영주들이 신정부를 세우고, 천황을 전면에 내세운 채 쇼군을 무너트리기 위해 일어선 것이었습니다.
미래는 늘 변화하는 자의 편이라고 하지요. 천황을 모시는 신정부의 군대는 고루한 쇼군의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이어갔습니다. 2차례에 걸친 대규모 원정에서 패배한 쇼군의 군대는 잔뜩 의기소침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쇼군의 충신들은 그런 오합지졸들을 어거지로 그러모아 오사카에서 결정적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주군에게 '합하께서 선봉에 서시어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주소서!'라는 간언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때 병사들의 사기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쇼군 그 자신이 오사카 진지를 버리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이랬습니다. 지금은 마지막 쇼군이라고 알려진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랫동안 유교(성리학) 교육을 받은 군주였습니다. 아무리 명목이라고 하더라도 '일본의 황제'인 천황에게 거역하는 것을 그에게 어쩐지 께름칙한 일이었지요. 그런데 전장에 나가보니 천황의 군대는 쇼군인 자신을 '반란군'이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천황기' 아래서 말이죠. 이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쇼군은 그날 밤 곧장 에도성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이렇게 구시대의 상징인 쇼군은 신정부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쇼군의 에도성을 지키고 있던 신하와 병사들의 뜻은 달랐는데요. 그들은 어차피 여기서 밀리면 죽음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쇼군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하나로 똘똘 뭉쳐 에도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2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는 도쿄도인만큼 그 시절의 에도 역시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 인구로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요. (이때 한양의 인구가 채 20만이 되지 않으니 에도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짐작이 가시는지요?) 더군다나 에도는 250년 동안 일본의 중심이었던 만큼 국가의 모든 주요 시설들이 시내 한복판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에도의 동북쪽을 관할하던 영주들은 에도만큼은 목숨으로 방어하겠다며 잔뜩 벼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천황의 군대와 일전이 벌어진다면 엄청난 희생을 피할 수 없었지요.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 쇼군이 전권을 위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가쓰 가이슈입니다. 가쓰는 쓰러져 가는 막부가 전쟁의 화마 앞에 놓여있던 순간, 에도성의 방어를 전담하는 총책임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역사의 전환점에서 전쟁을 막고 수백만명의 사람과 일본의 미래를 동시에 구한 결단을 만들어 냅니다. 과연 이 가쓰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런 역사를 엮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가쓰는 어렸을 적부터 검술과 군사학을 공부하며 전형적인 무인으로 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20살이 되던 무렵 급격히 변화하는 세상을 목도하게 되지요. 서양 오랑캐가 무시무시한 전함을 타고 돌아다니는데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구정부의 현실을 절감한 것인데요. 그러자 그는 더 넓은 세상에서 만들어진 난학(네덜란드 학문)을 배우겠다며 당시로서는 유명한 사람은 전부 찾아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닙니다.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가쓰는 수십 명의 네덜란드 사람과 교류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오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는 일본 제일의 해군 전문가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해군 기술관료로서 인정받은 그는 쇼군에게 군대의 근대화라는 중요한 책무를 맡으며 중용됩니다. 하지만 늘 할 말은 하는 성격으로 인해 출세길에서 승승장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때마침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에도성 방어의 총책임을 지게 된 것이지요.
오랜 세월 동안 넓은 세상을 봐온 가쓰는 이제 일본의 국운이 천황과 서쪽 지방 영주들이 만든 신정부 쪽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쇼군마저 적극적으로 싸울 의지를 상실한 마당에 죽기 살기로 에도를 지킨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설상가상으로 당시에는 서양의 군대가 호시탐탐 일본을 노리고 있었으니 가쓰에게 천황군과의 싸움은 일본을 패망 일로로 내모는 자살행위라고 느껴졌습니다. 결국 그는 지혜로운 항복을 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때마침 천황군을 지휘하고 있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예전에 가쓰가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둘은 이미 어느 정도 호감을 쌓고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특히 사이고가 가쓰에게 가지고 있었던 인상이 무척 강렬했습니다. 이미 4년 전쯤 가쓰를 처음 만났던 사이고는 그에 대해 '일본에서 가쓰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밝은 사람은 없다'라는 평가를 내린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가쓰가 사신을 보내 적극적으로 항복 의사를 표명하자 사이고는 몇 가지 조건을 내걸며 항복을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쇼군을 생포하겠다는 조건이 문제였습니다. 당시 쇼군을 주군으로 모시고 있던 가쓰로서는 이것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항복조건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직접 사이고를 만나 큰 소리 신정부의 옹졸함을 비판합니다.
'사이고공이 말하는 공(公)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지금 정권 장악이라는 사(私)에만 매몰되어 일본의 미래라는 공(公)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 전의를 상실한 쇼군을 죽여 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말이며 에도성을 전부 불길 속에 넣어버린다면 앞으로의 일본은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사이고로서도 가쓰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신정부 내에서 구정부의 수장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워낙 강했던지라 중대한 결단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고심 끝에 사이고는 쇼군이 근신하는 조건으로 에도의 항복을 받아줍니다. 이로써 에도는 1868년 4월 11일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성문을 열고 천황군에게 항복하게 됩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이 에도성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쟁의 기운이 옅어져 가는 것을 환영합니다.
그 뒤로 몇 달간의 저항은 있었지만 전쟁은 대체로 순조롭게 마무리됩니다. 에도성의 병력과 자원을 효과적으로 통합한 천황과 신정부는 일본의 모든 역량을 끌어모아 근대화를 위한 전진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메이지 유신'입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네요 교수님. 처음에 저에게 '일본의 근대화'가 어떻게 성공했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이 일화가 일본의 근대화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일본의 지도부는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끼리 싸운다면 미래가 없다는 위기감도 확산되고 있었지요. 그래서 당장 있는 조그만 기득권을 내려놓고 타협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만약 일본의 구정부가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다며 죽기 살기로 에도성을 지키려 들었다면 에도성은 폐허가 되고 신정부도 동력을 잃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웃나라인 일본이 서구식 근대화를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했는지, 그래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침탈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식민지 시대라는 큰 아픔을 겪은 우리에게 진실로 중요한 연구과제일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시대의 흐름을 읽고 상대방과 큰 틀에서 합의하는 정신이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어내는데 가장 중요한 요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합의를 만들어 낸 가쓰 가이슈의 혜안이 이후 근대화의 미래를 살아갈 수많은 일본인의 목숨을 살려낸 것이겠지요. 오늘 이야기한 가쓰 가이슈와 '에도성 무혈입성'의 사건을 통해 메이지 유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열쇠는 '지혜로운 합의의 정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참고 문헌
'사카모토 료마와 메이지 유신', 마리우스 B. 젠슨
‘메이지 유신 그늘 속 기획자’ 가쓰 가이슈의 명철(明哲), 중앙시사매거진
戊辰戦争,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에도성 무혈개성, 잡동사니의 역사이야기 블로그
※ 요즘 회사 일이 너무너무 많아서 일본 역사이야기를 많이 못 올렸습니다.(야.근.폭.발. 나의 주 52시간은 어디에) 앞으로는 주말마다 부지런히 정리하여 2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올리는 성실한 글쓰기 생활하도록 하겠습니다! 더불어 최근에 다루고 싶은 인물이 너무 많은데, 또 막상 쓰려고 하면 쉽지가 않아서, 궁금한 일본사 인물이 있다면 추천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