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기획자로 공모전/경진대회 수상하기
아! 진짜 힘들어 죽겠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줘.
초기 스타트업 기획자는 죽을 만큼 힘들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막상 계획처럼 되는 일은 하나도 없어서다. 유튜브에서는 고무장갑 뒤집어쓴 래퍼 선생님이 매일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소리치지만 현실 속의 나는 문자 하나만 띵동 해도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가'라고 말하는 게 일상이었다. 월초에 작성했던 마아-스터 플랜은 월말이 되면 형사의 취조 노트처럼 각종 사건 사고들로 가득했고, 이것이 초보 기획자가 좌충우돌하는 고단한 여정이었던 것 같다.
'야 우리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누가 상 좀 줘야 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을 했다. 나를 비롯한 우리 팀은 '5000만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서비스'(본인만의 오피셜이다)를 만들고 있는데 이걸 어두운 음지에서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게 너무 억울했다. 잔뜩 부상당한 몸으로, 마틸다의 얼굴을 감싸며 '난 너만 괜찮으면 돼'라고 멋지게 읊조리는 레옹이 체질상 맞지 않았던 것이다. 히어로로 치자면 다크 나이트보다는 아이언맨이 되고 싶었다는 비유가 적절하겠다. 이렇게 나는 온갖 규제와 예산 압박이 빗장수비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우리 팀을 칭찬하고 응원해줄 무언가가 절실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각종 공모전과 창업경진대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사내 스타트업도 참가에 문제가 없다.) 아마 공모전에 한 번이라도 참여해 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우리나라는 진짜 공모전 왕국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사시사철 탐스러운 공모전이 인터넷에 주렁주렁 열려있으니 말이다. 현재 열심히 하고 있는 사업이 있다면 그것과 관련 있는 공모전이 적어도 2개 정도는 올라와 있다고 보시면 된다. 그렇게 해서 우리 팀이 지난 6개월간 나갔던 대회가 총 3가지였는데, 오늘은 이런 대회들에 관한 시시콜콜 투머치 인포메이션을 참기름 착착 뿌려 요리해 보고자 한다.
결과 : 결선 탈락
아이디어마루의 '앱 아이디어 공모전'은 상당히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대회 취지를 자랑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주제가 되었건 신박한 앱 서비스'를 기획해보라는 것이었는데, 포상으로 '실제로 그 앱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온갖 장르의 서비스들이 두더지 게임마냥 뿅뿅 튀어나오게 된다. 같은 참가팀 입장에서 그런 기획안들을 듣고 있자면 감탄스러울 때도 있고 어이가 없을 때도 있었다. 개중에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건 '맛집 앞에 줄이 없는 시간을 알려주는 앱'정도가 있겠다.
이 공모전의 장점은 교육 지원이 굉장히 탄탄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실제로 앱을 출시하는 것이 공모전의 목적이다 보니 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꼼꼼히 가르쳐준다. 디자이너부터 시작해서 개발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사진이 참가팀의 아이디어를 상세히 리뷰하고 실질적인 피드백을 제공한다. 확실히 우리 팀만 해도 숙련된 디자이너가 앱을 요리조리 뜯어주니 예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UI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참가팀 입장에서는 대회 운영 상 불만을 가질 점이 엄청나게 많았다. 예를 들어 우리 팀은 최종 결선 당일 오후 3시 40분에 발표를 한다는 공지를 받고 발표장까지 부지런히 달려갔으나 6시가 넘도록 발표를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발표시간을 철저히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앞 순서의 조들은 최대한 주어진 시간을 활용했고, 나처럼 랜덤으로 뒷 순번을 받은 팀들은 냉방도 안 되는 복도에서(올해 8월의 더위를 기억하시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찐빵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표를 시작했으나 이번엔 대회 예산이 발목을 잡았다. 세상 경험이 별로 없는 우리 팀은 '앱을 만들어준다'라고 말하면 진짜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원해주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발표를 하는 중에 '디자인은 얼마 정도 들거같구요, 서버는 몇 대 필요하구요' 이런 식으로 시시콜콜 돈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심사위원 측에서 '저희는 그만한 돈은 없는데요?'라는 물음이 나왔다. '우리가 지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프로젝트인 것 같아요'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승리의 여신이 떠나기 위해 운동화 끈을 쪼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다 다를까 우리 팀은 여기서 '패-배'라는 결과를 얻었다.
결과: 최우수상(1등)
보건의료 빅데이터를 활용한 창업 아이디어 공모전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에서 팍팍 밀어주시며 주최하는 보건 분야 최고의 대회이다. 심평원은 현재 '보건의료 빅데이터 개방 시스템'이라는 오픈데이터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건강 정보 빅데이터가 가득가득 들어있다. 이번 공모전의 요지는 해당 데이터를 활용해 국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신통한 서비스를 제작해보라는 것이었다. 때마침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심평원의 요구사항과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이 대회는 워낙 의사, 약사 등 보건 분야 전문직들이 많이 지원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고, 실제로 현장에 가보니 그런 분들이 꽤 계셨다. 발표 대기장에서 혼자 쭈그리처럼 싱숭생숭한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바로 옆자리에서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에 대해 박사님들의 토론이 한창이었다. '우리 이거 발표했다가 괜히 바보 소리만 들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무렵, 발표장에서는 입장하라는 안내가 날아왔다.
발표 자체는 물 흐르듯 순조로웠다. 그러나 질의응답 시간이 문제였다. 수많은 전문가들 앞에서 나라는 금붕어가 어항을 뱅글뱅글 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대답하기 어려운 난감한 질문이 쏟아질 때면, 나는 그저 '앞으로 그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사업이 꼭 필요한 이유를 두 번 세 번 절절한 마음으로 반복했다. 심사위원 분들에게 '이 녀석은 진짜 진심이다'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몇몇 분들은 실제로 그런 모습이 귀여우셨던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으셨을 수도 있다) 너털웃음을 지으며 격려해주셨고 그렇게 심사가 끝이 났다.
이때 우리 팀은 정말로 장려상만 받아도 행복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대상을 주시는 통에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대개 SBS나 KBS에서 연말 시상식을 할 때면 호들갑 떠는 연예인들을 보며 '저 사람은 다 알면서 왜 저렇게 난리인가' 생각하곤 했었는데, 막상 태어나서 처음 큰 상을 받아보니 그분들이 10분씩 수상소감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팀은 아직도 이때 상을 받은 것이 인연이 되어 심평원 관계자 분들과 함께 재미있게 서비스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결과: 공공데이터 전략위원장상(총리급, 3등)
범정부 공공데이터 활용 창업 경진대회는 엄청난 규모의 대회였다. 총 80여 개의 공공기관이 참여하여 1800개가 넘는 팀이 지원했으니 공공기관과 협력하는 스타트업이라면 반드시 출전해야 하는 대회라고 하겠다. 우리 팀 같은 경우에는 심평원의 추천으로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이 본선에서의 경쟁이 상상 이상으로 치열했다. 그 이유는 대회의 참가팀들이 일반적인 스타트업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추천해준 기관의 대표이기도 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아주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회는 1차적으로 통합 본선을 열어 50개의 팀을 10개로 압축하는 과정을 거친다. 올해 같은 경우에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해당 발표를 진행했고 왕중왕전에 진출할 10팀의 '고수'들을 추려냈다. 사실 이날 했던 발표는 내가 태어나서 해본 발표 중에 가장 순탄한 발표였다. 심사위원 분들께서도 그런 모습을 알아봐 주셨던지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실제로 결과가 나온 뒤에는 좋은 아이디어 잘 들었다며 따로 연락을 주시는 분들도 있었으니 지렁이가 용 된 것처럼 무척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제 나는 왕중왕이 되고 싶었다.
대회의 왕중왕전은 서울창업허브에서 열렸다. 온갖 방송사와 관계자들이 아침부터 분주히 뛰어다니는 풍광을 보니 '와 오늘 내가 정말 중요한 대회에 나가나 보다'라는 생각이 시시때때로 들었다. 더군다나 청중평가단 분들이 100명이 넘게 오셨는데,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나한테 집중해 준 적이 있던가 하는 묘한 긴장감마저 생겼다. 하지만 원래 나와 같은 관심 종자들은 주목을 받으면 받을수록 생각에 없던 말까지 청산유수로 술술 나온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발표를 마치고 청중평가단으로부터 최고 점수를 받아냈다.(이건 마치 '나는 가수다'가 된 기분)
사실 이날 대회는 아쉬움이 정말 컸다. 예상보다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결선 대회의 평가기준은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첫째가 사전 대국민 설문조사, 둘째가 청중평가단 실시간 투표, 마지막이 전문 심사위원의 종합 결과다. 우리 팀 같은 경우에는 사전 대국민 설문조사, 청중평가단 실시간 투표에서 상당히 큰 격차로 1등을 하고 있었다. '와 살다 보니 대통령 상도 받아보겠네' 생각하고 있던 차에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로 나왔다. 웬일인지 심사위원 평가가 합산되자 우리 팀이 3등으로 밀려버린 것이었다. 사실 아직도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른 팀들도 왕중왕답게 정말 잘했고, 우리 팀의 3등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젊으니 대통령 상 받을 기회가 앞으로 10번도 더 있다' 다짐하며 툴툴 털어버렸다.
일 년을 갈무리해 가는 지금에 와서 호주머니에 반짝반짝 빛나는 상패 2개를 품고 있다는 것은 서비스를 준비해 가는 입장에서 1년 농사 잘 지은 것처럼 뿌듯한 일이다. '당신은 지금 옳은 일을 잘하고 있다'는 '세상의 인정'은 고된 여정을 자처하는 스타트업 기획자들에게 마라톤 식수 코너처럼 달콤한 기분을 선사해 주는 것이다. 사실 앞으로도 우리 팀은 신세계에 도착하기 위해 바다를 3개는 건너고 산을 5개는 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이건 참 괜찮은 서비스네요, 세상에 꼭 내놓아 주세요'라고 말한 익명의 그분들을 위해 무릎 탁탁 털고 일어설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음번 글에서는 공모전에 출전하는 것이 스타트업 팀에게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써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