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관계에서 '나' 찾기
몇 년 전 이사를 하면서 새 침대를 들였다. 갈색 프레임에 보기 좋은 광택이 흐르는 침대였다. 이상하게도 그 침대에서 처음 잠을 청하던 밤, 나는 조금 울었다. 잠들기 전에는 으레 이런 저런 생각 속을 헤매었는데 그러다 문득 원래 침대를 버렸다는 사실을 생각해냈기 때문이었다. 불운한 일들이 겹칠 때마다, 나는 늘 그 침대에 엎어져서 울었었다. 그때 그 침대는 속마음을 말없이 들어주는 품 넓은 고치였다. 느닷없이 터진 울음은 그 시간을 받아내주던 그 침대가 지금은 이름 없는 사물로 버려졌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똑같은 디자인을 한 다른 침대가 버려진 것이었다면 난 울지 않았을것이다. 그 많은 공산품 중에서 '그 침대'가 특별했던 것은 나의 그 시간을 함께 해준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이었기 때문이다. 공산품 인형일지라도 매일 밤 품에 안고 자는 ‘그’ 인형만이 내가 붙여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비슷하다. 아무리 똑같은 인형을 사다주어도 그것은 원래 내가 품고 자던 미미가 될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자소설을 쓰거나 공모전에 응모할 때, 내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지 절감한다. 아무리 '내가 이렇게 독특해요!', '내가 이렇게 유일해요!'라고 말해도 비슷한 스펙의 서류 중에 하나일 거라는 상상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예전에 봤던 어느 광고에서는 이력서의 사진 속 인물이 절박하게 자신을 어필하지만 곧 파쇄기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만다(무슨 광고가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는지..) 내가 얼마나 평범한 사람인지 더 느끼고 싶다면 보험사에서 나를 데이터화한 목록을 상상해보는 방법도 있다. 성별, 연령, 지역, 질병 유무 등등 몇 개의 항목에 가지런히 쓰여있는 기록의 집합이 곧 '나'라는 그 엄격하고 근엄한 서류 뭉치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사실 내가 누구인지는 보험사의 인공지능보다는 내 오래된 침대나 미미가 더 잘 알 것이다. 내가 어떤 성격의 부모님 아래서 자랐는지, 어떤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 시무룩했는지, 몇 시에 잠들어 몇 시에 일어나는지,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어떤 음악을 듣는지 그들은 안다. 가족, 친구, 시간, 미묘한 감정과 내가 맺는 관계들은 보험사의 서류 어디에도 기입될 수 없다. 아무리 나와 동일한 수치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와 나는 다른 사람이다. 이 사실을 수치의 엄정함 앞에서 감히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그와 내가 세상과 맺은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와 나는 무수한 관계의 단 하나뿐인 교집합이다. 그의 초등학교 1학년 담임샘과 나의 담임샘은 다르다. 그가 쓰는 향수와 내가 쓰는 향수가 다르다. 그 향수를 누구를 위해 뿌렸는지도 다를 것이다. 그때의 설렘도 서로 다른 색과 모양을 가졌을 것이다. 이처럼 기록될 수 없는 것, 말해질 수 없는 것, 수량화될 수 없는 것만이 육박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의 그다움이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달렸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맺는 관계에서 오기 때문이다. 너를 내가 오늘 새롭게 알게 되었다면, 나는 이제 더이상 어제와 같은 사람이 아니게 된다. 내가 부르고 네가 대답한다는 일이 나를 만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안 뒤부터 늘 네가 고맙다. 때로 미워하고, 혹은 영원히 미워하게 되더라도 네가 없다면 나는 그만큼 덜 나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서로 미워하지 말고 어여쁘게 여겼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의 건반이다. 같이 눌렀을 때 불협화음이 나는 건반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시와 도가 그렇다. 그러나, 불협화음이 난다는 이유로 시가 사라지길 바라는 도가 있다든지, 도를 피아노에서 제거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시가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누군가 밉다면, 누군가가 나의 '도'라면 그와 나 사이에 다른 음들을 끼워넣어서 음악이 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