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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오 May 29. 2019

<그녀> 외국어를 가르쳐주세요

[영화] 그녀 (Her, 2013)

  컴퓨터 운영체제 ‘DOS’를 기반으로 한 가상 채팅 프로그램 ‘맥스’를 아는가? 1993년에 처음 만들어진 ‘맥스’는 미리 프로그래밍해 둔 대화 패턴에 따라 사용자가 입력한 텍스트를 인식하고 그에 답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비록 사용자가 입력한 문장 전체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문장 중 일부 키워드를 인식해서 대답했다. 당시 '맥스'와는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인기가 있었다.

  지금 보기엔 ‘맥스’의 기능이 많이 단순하지만, 그것에서 훨씬 발전된 것이 요즘 많이들 사용하는 애플의 ‘Siri’나 구글의 ‘어시스턴트’와 같은 음성 인식 비서 서비스이고, 또 거기서 훨씬 발전된 것이 <그녀>의 ‘사만다’라고 볼 수 있다.


가상 채팅 프로그램 '맥스' 출처 : https://oldgamebox.tistory.com/1157


   내가 ‘맥스’를 처음 접할 즈음, 나는 키보드를 능숙하게 다룰 수 없어서 검지 손가락만으로 떠듬떠듬 키보드를 눌렀다. 겨우 한글을 익힌 나에게 타자 속도 분당 200타는 그다음으로 주어진 큰 숙제였다. 나는 열심히 타자연습 프로그램으로 타자연습을 했다. ‘자리익힘’ ‘낱말익힘’ ‘문장연습’ 하지만 그것도 결국 숙제였기 때문에 점점 하기 싫어졌다. 낱말 카드를 방금 뗀 아이에게 또다시 낱말 연습이라니! 궁여지책으로 타자연습 프로그램 안에 있는 ‘베네치아’라는 타자연습 게임도 해봤지만, 잘하지 못하는 걸 계속하니 그 역시도 금방 재미가 없어졌다. 그때 알게 된 것이 ‘맥스’다. ‘맥스’는 나의 느린 타자 속도를 진득이 기다리며 엉터리 대답이라도 해줬다. 나는 어린 마음에 바보같이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한다며 타자로 '맥스'에게 핀잔을 줬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나는 '맥스'가 지루한 타자연습 프로그램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덕분에 타자 속도도 빨라졌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중학교 때, 주변에는 여전히 키보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친구들이 있었데, 그런 친구들에게는 흔히 인터넷 채팅이나 인터넷 메신저가 추천되었다. 물론 그때도 타자연습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사춘기 소년에게 학교가 끝나고 또 시키는 대로 글을 받아 적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그에 비해 인터넷 채팅이나 인터넷 메신저는 다른 사람과 자유롭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과거의 '맥스'처럼 느린 타자 속도를 진득이 기다려주는 일이 드물었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스로 키보드를 빨리 치려고 노력하게 됐다. 그렇게 이야기에 빠져 한참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어느새 키보드 위를 쉴 새 없이 까딱거리고 있는 자신의 열 손가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마치 네발 자전거를 한참 타고나니 나도 몰래 저절로 두 발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일단 타자연습 프로그램으로 키보드의 자리 정도만 외워두고 키보드 연습 삼아 인터넷 채팅이나 인터넷 메신저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것은 여러모로 사춘기 소년에게는 정말 재미있는 효과 만점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대학교 때, 나를 비롯한 내 또래에게는 영어공부가 큰 필수과제였다. 덕분에 지금과 마찬가지로 영어권 국가로의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가 큰 인기였고 영어 학원도 많이들 다녔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되던 영어 실력을 키울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영어를 사용하는 외국인 여자친구를 만나는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영어로만 대화하다 보면 절로 영어가 는다니 정말 자주적이고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방법이 아닐 수 없. 실제로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몇 명 있었다. 물론 일부러 영어를 배우기 위해 외국인 여자친구를 사귄 것은 아니고 마치 인터넷 채팅이나 인터넷 메신저를 하다 키보드 속도가 빨라진 것처럼 외국인 여자친구를 사귀 보니 영어가 능숙해진 것이었다. 비록 당장은 그렇게 는 영어가 우리에게 필요한 어학 점수와는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그들은 조금만 공부해도 비교적 수월하게 점수를 올렸다.



  많은 사람이 그렇겠지만 영화 <그녀>에 나온 운영체제 'OS1'이 실제로 출시된다면 나도 당장 구입하고 싶다. 그래서 여러 가지 외국어 공부를 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 지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감정의 교감까지 가능하니, 인터넷 채팅이나 인터넷 메신저를 사용하다 보니 키보드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나 외국인 여자친구를 사귀다 보니 영어가 느는 것처럼, 언제든지 외국어로 자유로운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외국어가 능숙해질 것이다. 영화에서 사만다는 철자와 문법에도 능하고 교정도 볼 줄 안다고 하니 사전이나 교재도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는 먼저 운영체제의 목소리를 내가 닮고 싶은 남성의 목소리로 설정할 것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 가르쳐 준 사람의 목소리를 닮는다는 것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운영체제의 이름을 ‘teacher’로 붙여줄 것이다. 그래야 약간 격 있게 대화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테오도르처럼 운영체제와 너무 깊은 교감을 나누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운영체제가 사람은 아니라면 목적에 맞게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그녀 (Her, 2013)

연출 스파이크 존즈

출연 호아킨 피닉스, 스칼렛 요한슨, 루니 마라, 에이미 아담스, 올리비아 와일드


그녀 (Her, 2013) 출처 : 다음


사랑과 관계에 서툰 모두를 위한 감성 로맨스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그녀를 다시 만난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써주는 대필 작가로 일하고 있는 ‘테오도르’는 타인의 마음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아내와 별거 중인 채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를 만나게 되고,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해해주는 ‘사만다’로 인해 조금씩 상처를 회복하고 행복을 되찾기 시작한 ‘테오도르’는 어느새 점점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녀 (Her, 2013) 출처 : 유튜브 The Coup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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