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리오 Dec 05. 2019

'용기의 도시' 프랑스, 파리의 시간을 산책하다

[전시] 매그넘 인 파리

  문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바깥 풍경은 어제와 다름없다. 깊게 들이마시는 숨도 마찬가지다. 건너편에 새로 짓는 저 건물만 조금 더 올라갔을 뿐이다. 간밤에 비가 왔는지 바닥이 젖어 있다. 할인마트 앞에는 행사 중인 여러 가지 물건들이 늘여져 있다. 이동통신 대리점에는 오늘도 유니폼을 입은 두 사람뿐이다. 신호등의 빨간불이 앞을 막는다. 보통인 하루다. 얼굴 없는 사람들은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빠르게 걸어간다. 공원으로 들어서며 음악을 바꾼다. 갈 때마다 같은 길과 나무 덕에 안심된다. 벤치도 모두 축축하게 젖었으므로 오늘은 앉아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대신 화장실이나 한번 들른다. 무빙워크처럼 흐르는 풍경에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다시 출구다. 빡빡했던 머릿속에 살짝 틈이 생겼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매그넘 포토스의 이번 사진전, ‘매그넘 인 파리’를 관람하는 것은 마치 익숙한 거리를 산책하는 것과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파리의 모습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곳의 거리에는 언제나 격변이 넘쳐났지만, 걸음을 옮기면 스쳐 지나갔으므로 부담스럽지 않았다. 눈에 익은 사진이 많았기 때문에 그 자체도 일상적이었다. 전시장에 풍겨놓은 그 시절 파리 거리의 냄새는 역사적 순간이 담긴 사진을 더욱더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그가 만든 매그넘 포토스의 열렬한 팬으로서, 그들의 사진전이 열리면 쫓아가는 것도 으레 있는 일이었다. 항상 움직이고 있는 파리의 거리도, 그 모습을 담은 사진도, 매그넘 포토스의 전시도 모두 익숙했다. 덕분에 두  시간 남짓 되는 관람 시간이 하루라도 거르면 서운한, 매일 가도 반가운 산책 같았다.



  2012년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전, ‘결정적 순간’을 보고 나왔을 때의 느낌은 사진이라도 찍어놓은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난다. 순간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원래는 두 시간 정도 보고 나서 늦은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와보니 네 시간이나 흘러있었다. 아침도 거른 탓에 배는 무척 고팠지만, 막 든든해질 참이었다.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길래 세계사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장소에 있을 수 있었을까?’ 집에 돌아와 인터넷과 책을 뒤져가며 그를 알아갔다. 사진집뿐만 아니라 에세이나 인터뷰집도 읽었다. 매그넘 포토스와 소속 작가들의 사진을 찾아보고, 열리는 사진전마다 쫓아다녔다. 그들의 작품은 내가 그동안 볼 수 없었고, 알지 못했던 세상의 많은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전시에 다녀와서 함께 수학 공부하던 학생에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소개했다. 필름 카메라와 DSLR을 사용할 정도로 사진에 관심이 많던 그 친구는 곧장 전시회에 갔다. 사진전 관람이 끝나고, 아이는 내게 전화해 너무 좋았다고, 그래서 사진집도 샀다고 했다. 나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몹시 당황했다. 10만 원이 훌쩍 넘는 사진집의 가격이 고등학생에겐 큰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괜한 헛바람을 넣은 건 아닌지 걱정된 나는 부모님께 여쭤보았냐고 물었고, 아이는 전화해서 여쭤보니 흔쾌히 허락해주셨다고 했다. 그제야 나는 마음껏 뿌듯했다.



  방에 걸어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다. 부디 그 친구가 가끔은 그때 산 사진집을 다시 보기를, 그래서 무겁고 두툼한 그 책이 짐스럽게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번 전시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것도 그 친구였다. 나의 사정 때문에 연락이 끊겼지만, 사진전을 보는 와중에도 그 아이가 다녀갔을지 궁금했다. 이제는 상황이 좀 나아졌으니, 안부도 주고받을 겸 전화해서 물어볼 만도 한데 좀처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간에 흐름에 따라 변화해내는 사진 속 파리의 일상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일상을 없애는 것은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상적인 걱정 하나 없애지 못하는 것에 반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의 힘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낭만의 도시, 파리는 용기의 도시이기도 하다.




매그넘 인 파리

기간 2019년 9월 25일 (수) ~ 2020년 2월 9일 (일)

장소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제1전시실,제2전시실,제3전시실


매그넘 인 파리 출처: 예술의 전당


파리는 세계 최초로 사진을 발명한 사람으로 기록된 프랑스의 오페라 무대 예술가 루이스 자크망테 다게르가 <탕플 대로(the Boulevard du Temple)>라는 첫 번째 사진 작품을 남긴 도시이자 사진술의 발명에 맞서 인상화 화가들이 자신들만의 새로운 회화 기법을 발전시킨 역사적 장소였다. 이번 전시는 이런 파리를 세계 사진사에 휘황한 이름을 남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카파, 마크 리부를 비롯해 엘리어트 어윗, 마틴 파 등 세계적인 사진작가 40명의 사진 작품 267점과 122컷의 사진으로 구성된 영상 자료를 통해 바라본다. 또 파리 관련 고서 및 지도, 일러스트 32점이 출품되어 1800년대 근대 수도로서 파리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살롱 드 파리’도 조성됐다. 이번 전시는 시인, 작곡가, 공예가, 영화 감독, 시각 디자이너, 조향사 등이 참여한 ‘아티스트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통해 ‘예술의 수도’ 파리의 모습을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서 보여준다.

출처 : 예술의 전당



작가의 이전글 해왕성까지 가서 얻은 깨달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