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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오 Dec 19. 2018

물멍: 더욱더 달아진 시간

[일상] 열대어 키우기

  초등학교 때 집에 돌아와 문을 열면 정면에 수조가 하나 있었다. 그 안에는 구피, 소드 테일, 몰리, 엔젤 피시가 살고 있었는데, 특히 구피나 소드 테일, 몰리의 번식력이 너무 좋아서 순식간에 수조가 한두 개 더 늘어다. 그때는 열대어를 키우는 것이 유행이어서 집마다 수조 하나씩은 다 있었다. 거실장 위, 커다란 브라운관 텔레비전 옆에 보면 어김없이 수조와 열대어 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보통 구피가 많이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수초 사이를 다니는 모습을 사람들은 꽤 이뻐했다. 구피는 난태생 열대어라고 해서 알을 뱃속에서 품고 있다가 부화해 새끼를 낳는 물고기다. 때문에 벽에 작은 플라스틱 부화통을 붙이고 그 안에 산란이 임박한 어미를 넣어두면 어렵지 않게 새끼를 받을 수 있었다. 구피는 암컷 한 마리가 한 달에 한 번은 새끼를 낳을 정도로 번식력이 뛰어난데, 이러한 구피의 손쉽고 왕성한 번식이 열대어 키우기를 유행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나중에는 구피가 새끼를 하도 많이 나서 나눠줄 사람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미 다들 열대어를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난감했다.



  그때 나는 거의 매일 턱을 괴고 멍하니 수조를 보았다. 얼굴을 바짝 수조에 가져다 대면 마치 내가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수조에 가까이 가기만 해도 놀라 도망을 가는 겁 많은 물고기도 있었고, 먹이를 주는 줄 알고 수면 위로 헛입질을 하는 물고기도 있었다. 걔 중에는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내 인중으로 다가오는 물고기도 있었는데,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물고기의 아가미를 보면서 최면에 빠지는 숙제나 시험 걱정 따위는 들지 않고 그저 멍해졌다.





  며칠 전 나는 오랜만에 수조를 하나 집에 들였다. 그리고 그 안에 구피를 분양받아 넣었다. 사실 예전에는 구피의 꼬리가 마치 시골에서 밭일할 때 입는 몸빼바지 같아 촌스럽게 느껴져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고정구피라고 해서 색이나 무늬, 체형을 개량한 독특한 구피들이 많이 있어서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내가 분양받은 것은 EMB(Electirc Moscow Blue)라고 해서 수컷이 살랑살랑 헤엄을 치면 꼬리에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물결이 치는 파란색 계열의 구피다.

  덕분에 나는 요즘 이 구피 수조를 보는 것에 다시 맛들었다. 어릴 때처럼 여전히 코끝을 수조에 바짝 갖다 대면 잽싸게 도망가 몸을 숨기거나, 수면 위로 올라와 뻐끔거리거나, 슬금슬금 눈앞으로 다가오는 되려 나를 관찰하는 물고기들이 있다.

  하지만 거기서 내가 느끼는 것은 어릴 때와는 좀 달라졌다. 수조를 보고 있으면 마치 머릿속에 잡스러운 생각들이 물속에 침전하는 나에게서 분리되어 수면으로 떠올라 사라지 것 같다. 그면서 그 시간들이 어릴 때 보다 훨씬 더 달게 느껴진다. 아마 어릴 때 보다 내려놓고 싶은 생각들이 많아서인 것 같다.



  근데 사실 난 원래 EMB 보다는 검은 눈의 새빨간 풀레드 구피를 기르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오히려 EMB를 기르게 된 것이  잘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수조에 새빨간 색의 구피가 하늘하늘 움직이면 생각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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