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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오 Dec 30. 2018

위대함에 대한 달갑지 않은 무게

[영화, 넷플릭스] 바람의 저편, 2018

  4개월 동안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만 들었다. 다른 음악은 듣지도 않았다. 언젠가 그 곡의 4악장의 강렬함 때문에 곡 전체의 매력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품게 되었고, 마침 그것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장 먼저 다양한 지휘자들과 교향악단의 연주를 계속 돌려가며 들었다. 베토벤이 누군지는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가 작곡한 교향곡 9번에 대해선 거의 알지 못했다. 교향곡이란 형식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각각의 지휘자나 합창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도 알지 못했다. 그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알아야겠다’는 욕망과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몇 장의 추천 음반으로 베토벤과 그의 음악에 대해 알아볼 작정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국어 시간을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맨 처음’은 무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작품을 감상을 하기 전, 성급하게 다른 이의 감상이나 해석을 보면 그것의 무게에 매몰되어 작품을 온전히 스스로 감상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머릿속에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그리고 그것과 연관된 각 악장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들었다. 그렇게 집요하게 음악을 들었던 것은 고등학교 때 잉베이 말름스틴의 음악을 듣느라 이어폰을 꼽고 밥을 먹었던 이후 처음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모든 이미지가 그려지고 나서야 드디어 '합창' 대한 해석과 감상을 찾아보았다. 그러자 아무런 긴장감 없이 편안하고 자유롭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게 맞는 지휘자를 찾을 수 있었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교향악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얼마간 또다시 베토벤 교향곡 9번만 들었다. 그때 난 그 음악 속에서 팝도 재즈도 락도 힙합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음악에 대한 갈증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바람의 저편, 2018 출처 : IMDb


  종종 어떤 작품보다 그것에 얽힌 이름이나 형식에 압도되어 버릴 때가 있다. ‘명작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보니까’ ‘상식이니까’와 같은 이유로 얼마의 부담감이나 의무감, 압박감을 끌어안고 그다지 흥미도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감상에 맞춰 꼭 들으려 하고 꼭 보려고 꼭 느끼려 한다. 근데 꼭 그래야 하는 건 없다. 어떤 것을 꼭 봐야 하고 꼭 들어야 하고 꼭 느껴야 하는 이유는 순전이 그것에 대한 ‘호기심’ 이어야 하고 그래야 아무리 어렵고 무거워도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계속 듣고 볼 수 있고, 끝내는 느끼고 알 수 있게 된다. 물론 그쯤 되면 ‘안다’는 것이 무의미해지지만 말이다.




바람의 저편, 2018 출처 : IMDb


  <바람의 저편>은, 그 유명한,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화로 꼽히는 <시민 케인>의 감독, 오손 웰스의 유작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바람의 저편>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그가 늙으막히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싶어서였다. 솔직히 영화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왜냐면 유작까지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예상한 대로 영화는 단편적이었고 사적이었으며 일방적이었다(어쩌면 이미 편견에 사로잡힌 채 영화를 봐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 마치 어렸을 때 무릎을 꿇고 듣던 할아버지의 회상 같았다. 그는 당시 영화업계에서의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필름에 뿌려버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찜찜했다. 그렇다고 영화를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오손 웰스의 이름이 아니라면 그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 같았다. 나는 그와 이 영화를 그냥 모르는 채로 둘 수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무게를 또 끌어안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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