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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리오 Mar 08. 2019

<그린 북> 셜리 박사와 토니의 내용이 있는 여정

[영화] 그린 북 (Green Book, 2018)

  작년 말, 마음에 좀 도움이 될까 하여 집에 물고기 몇 마리를 들였는데, 좀 신경 써서 길러보자니 생각보다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수조라던가, 바닥재라던가, 여과기라던가, 사료라던가… 아무튼, 그래서 필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물고기 카페 몇 군데를 가입했다. 때가 때이니 만큼 그곳에는 많은 연말 정모 후기가 올라와 있었고, 올해는 왠지 잘 느낄 수 없던 연말 분위기를 느껴볼 요량으로 사진이 많은 글을 골라서 읽어보았다. 정모에 모인 회원들은 서로 음식과 선물, 이야기를 나누며 무척 화기애애해 보였다. 회원들의 나이대가 어린아이부터 중년까지 상당히 폭넓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사진들 속에는 유독 낯이 익은 한 남자가 있었는데, 혹시나 하고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딱히 그가 누구인지 떠오르지는 않았다. 또래로 보이는 그 남자는 마음먹고 주변을 찾아보면 닮은 사람이 한 명쯤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밤, 잠이 잘 안 와서 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고 있는데, 카페 정모 사진 속 낯익은 남자가 떠올랐다. ‘아… 분명히 아는 사람 같은데’ 머릿속에는 얼마 전 마트 계산대에서 봤던 사람부터 대학 때 함께 교양 수업을 들었던 다른 과 사람까지 터무니없을 만큼 온갖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중 그 남자의 얼굴은 없었고, 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을 그만두고 어떻게든 자보려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번뜩 남자의 정체가 생각났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고등학교 졸업앨범을 뒤적거렸다. ‘찾았다!’ 거기에는 남자와 닮은 한 소년의 사진이 있었다.


그린 북 (Green Book, 2018) 출처 : 다음


그린 북 (Green Book, 2018) 출처 : 다음


  다음 날, 친구에게 연락을 해볼까 했지만 좀 망설여졌다. 비록 같은 반이었다고는 해도 졸업을 하고 시간이 많이 흘렀고 결정적으로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 때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냥 인터넷 카페에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을 봤다는 ‘신기함’과 ‘반가움’이 동기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냥 한 번 연락해보는 거지’라는 생각에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그린 북 (Green Book, 2018) 출처 : 다음


  다행히 친구는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고, 우리는 그날 밤 바로 만났다. 먼저 카페 앞에서 마주친 친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커피를 주문하면서도 연신 ‘반갑다’ ‘신기하다’는 말로 어색한 웃음을 덮어보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상황이 만나기 전 예상했던 딱 그대로였다. 평소처럼 개인사를 피해 이야기하려니 테이블에 앉고 얼마 되지 않아 할 말이 바닥나버렸다. 공유할 수 있는 고등학교 시절 기억도 없었고, 겹치는 친구도 없었다. 비슷한 관심사라고는 물고기 키우기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키우는 규모의 차이가 커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기 일수였다. 나는 그저 ‘구피’ 몇 마리 키우고 있는 것이 전부지만, 친구는 수십 개의 어항을 갖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근황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지냈는지 까지 애써 거꾸로 짚어 올라갔다.


  이후 우리는 몇 번 더 만났다. 서로의 사적인 사정과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간단한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졸업하고 쭉 연락하고 지낸 고등학교 친구만큼은 아니더라도, 우연한 동창과의 만남을 귀하게 여겨서 악의 없이 나름 친해져 보려고 노력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린 북 (Green Book, 2018) 출처 : 다음


  우리는 분명 고등학교 때 서로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같은 반이긴 했지만 서로에게 말을 할 일이 없었다. 그 말은 애초에 서로가 친해지지 못할 만했다는 것이다. 성격이 달랐거나  취향이 달랐거나 말투가 달랐거나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건. 영화 <그린북>에서 피부색과 출신, 성향이 다른 셜리 박사와 토니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때부터 이미 각자가 자신만의 단에 올라있던 것이다. 그리고 졸업한 이후 각자의 삶을 살면서 그 단은 더 높고 단단해졌다. 


  우리에게는 서로의 단에서 내려올 생각이 딱히 없었다. 분명 서로 손을 내밀긴 했지만 그저 잡고만 있을 뿐 어느 쪽도 당기거나 마중하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함께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은 1년은 셜리 박사와 토니의 8주 동안 미국 북부에서 남부까지 순회한 여정에 비하면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그린 북 (Green Book, 2018) 출처 : 다음


  아무튼, 그래도 그 친구와는 아직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다.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가 대화의 대부분이긴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함께 보낼 수 있는 여정이 그것뿐인 것을. 확실히 그 친구를 만나고 나서부터 좀 더 여러 가지 물고기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영화의 엔딩처럼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근데, 진짜 신기하게도 좀 전에 그 친구에게서 자신의 물고기를 사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다.




그린 북 (Green Book, 2018)

연출 피터 패럴리

출연 비고 모텐슨, 마허샬라 알리


그린 북 (Green Book, 2018) 출처 : 다음


언제 어디서든 바른 생활! 완벽한 천재 뮤지션 ‘돈 셜리’
원칙보다 반칙! 다혈질 운전사 ‘토니’
취향도, 성격도 완벽히 다른 두 남자의 특별한 우정이 시작된다!

1962년 미국, 입담과 주먹만 믿고 살아가던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교양과 우아함 그 자체인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박사의 운전기사 면접을 보게 된다. 백악관에도 초청되는 등 미국 전역에서 콘서트 요청을 받으며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돈 셜리는 위험하기로 소문난 미국 남부 투어 공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투어 기간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로 토니를 고용한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토니 발레롱가와 교양과 기품을 지키며 살아온 돈 셜리 박사. 생각, 행동, 말투, 취향까지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그들을 위한 여행안내서 ‘그린북’에 의존해 특별한 남부 투어를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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