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말.
남편과 나는 11살 차이가 난다. 내가 지금 36살이니까 남편은 47살. 반 백 살이 다 되어서야 첫 아이를 안아본 남자는 아기와 있는 시간을 더없이 소중히 여긴다. 출산의 고통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지만, 출산을 하기 위한 긴긴 레이스는 우리 둘이 함께 했으므로, 내 출산에 남편을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그 레이스 동안 남편에게 들었던 인상 깊은 말들을 정리해 보았다. (미리 강조하지만 내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양수가 터지고 분만장에 들어왔다. 당연히 나의 보호자는 남편이었다. 내가 분만한 병원은 보호자 한 명만 입실할 수 있었고, 그 보호자는 분만장을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새로운 항균 풋커버와 가운을 입고 벗고 하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내가 진통을 하고 있던 첫날 (첫날이라니. 아마따 나는 진통을 1박 2일 했지ㅋㅋㅋㅋㅋㅋ?) 점심. 우리 엄마도 병원에 왔는데, 병원 원칙에 따라 엄마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엄마는 그럼 남편이랑 점심이라도 먹겠다고 해서 난 그러라고 했다. 우리는 새벽부터 이미 10시간이 넘게 공복 중이었던 데다, 남편까지 옆에서 고생하는 게 안쓰러워 엄마 보고 남편에게 맛있는 밥 좀 사주라고 문자를 찍어 보내고 있었다.
"그럼 나 잠깐 밥 먹고 올게."
쿨하게 남편을 보내고, 나는 계속해서 짐볼을 타고 진통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통 간격이 줄어들고, 자궁수축 수치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으어어어.....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래도 지금 당장 아기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 남편의 식사시간을 방해할 순 없지. 빨리 오라고 카톡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내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의사가 말했다.
"남편은요?"
"밥 먹으러 갔어요."
"하긴 밥은 먹어야 하니까요. 쩝...."
다시 시작된 잠깐의 무통의 시간
그리고 또다시 시작된 진통의 시간.
그 사이 의사는 두 번이나 더 왔다 갔다.
"아니 보호자 어디 갔어요?"
"밥 먹으러 갔어요."
"아니 무슨 밥을 한 시간이 넘게 먹어요?"
한 시간이 지났구나. 단전에서 시작된 깊은 빡침. 남편에게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는다.
카톡을 보냈다. "지금 무슨 쇼핑몰에서 식사함?" 1이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에게 전화했다. 역시 받지 않는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지독하게 휴대전화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 난 엄마랑 통화를 해야 할 때면 그냥 집으로 전화를 걸 때가 많다. 엄마에게 그럴 거면 핸드폰을 왜 가지고 다니는 핀잔을 하는 것 또한 포기했다. 그냥 안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에게 번갈아가면서 받을 때까지 했다.
"어머 딸, 사위랑 커피 마시고 얘기하느라 전화 온 줄 몰랐네. 괜찮아?"
"아! 지금 둘이 뭐 데이트하러 아산병원 왔냐고, 빨리 남편 보내!!!"
남편은 한 시간 반 만에 왔고, 난 생전 하지도 않던 욕을 하면서 남편에게 화를 냈다.
"아니.. 어머니 말씀하시는데 내가 끊을 수도 없고..."
(우리 엄마는 원래 흥분하면 말이 많아지는데, 하긴 딸이 진통하고 있으니 또 얼마나 흥분했겠어..)
"그래서 무슨 대화를 했는데?"
"어.. 어머니 진통한 얘기?"
엄마가 36년 전에 진통한 얘길 왜 오늘 듣냐고.
남편들이여. 일상적인 '나 잠깐 밥 먹고 올게'는 언제나 해도 되지만, 아내가 진통을 할 때는 웬만하면 자제하시길. 친정엄마들이여. 흥분을 자제하시고, 보호자는 꼭 산모 곁에 두시길.
진통을 시작하고 꼬박 12시간이 지난 저녁. 오늘 출산은 무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아직 아기를 낳지도 않았는데 난 이미 지칠 대로 너무 지쳐버렸다. 먹은 것이 없었고, 전 날 영화를 보고 노느라 잠을 자지도 못했고, 진통을 이겨낸 허리는 이미 눕지도 못할 만큼 아파오는 데다 아직 양수도 줄줄이 새어나가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힘들었던 건 계속해서 진행되는 내진과 힘주기였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손가락 들 힘조차도 없는 것 같았다.
언젠가 나는 한 남편이 출산을 하는 아내가 내진을 받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성관계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 남편도 비위가 강한 편이 아닌데, 혹여나 우리 남편도 충격을 받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남편에게 물었다.
"오늘 나 내진받는 거 좀 충격적이지 않았어?"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이 방에 있으면, 나는 이 장면을 네모난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 좀 현실이 아닌 것 같아. 자기가 힘을 주고, 선생님들이 도와주고, 계속해서 아기도 나오려고 기를 쓰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애쓰는 그런 모든 과정들이 난 아름다워 보여."
고마운 말이었다. 나는 남편의 점심시간의 과오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래도 난 평생을 서운해할지도 몰라. 흥.
내 남편의 장점이자 단점은 연륜이다. (부부 사이에 연륜이라. 다시금 우리의 나이 차이가 확연해진다.) 먼저 장점이라고 말한 이유는, 나보다는 어른스럽게 문제가 발생하면 한 발자국 물러나서 침착하게 대처하기 때문이고, 단점이라고 말한 이유는, 나이가 많은 그 앞에서는 나의 문제들이 가끔 너무 아무 문제도 아닌 것처럼 치부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출산이라는 경험은 우리 부부의 인생 최대의 경험이라고 하기에 과언이 아니지만,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출산 직후의 내 멘털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계속되는 고통, 아기를 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아쉬움, 댕댕거리며 붓고 있는 내 몸뚱이. 그리고 다시 찾아온 임신 전부터 나를 괴롭히던 편두통. 훗배앓이가 끝나고 이제 산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기다리는 것은 혹독한 두통이라니. 몸이 이러하니 산후 우울감이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괜스레 남편이 미웠다. 남편이 잘못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남편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아기를 안았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왜 나만 이렇게 아프고 힘들어야 해?' 이 생각이 들어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하는데, 화룡점정으로 남편은 마침 나와 아기를 면회하러 온 동생 부부에게 내 출산의 경험을 (대신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경미가 내진을 받는데 어쩌고~, 소리를 지르는데 어쩌고~ 와 나 완전 쫄렸네, 어쩌고....'
'뭐야, 자기가 경험한 것처럼 떠드네?'
남편은 있는 그대로를 설명한 것뿐인데, 매우 거슬렸다. 이제부터 내 의자와 상관없이 눈물과 콧물이 마구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자기는 혼자 출산의 기쁨에 도취되어 있다니. 나는 오열에 가깝게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왜 자기만 기쁘냐고. 난 아직 너무 힘든데 자기만 기뻐서 난리냐고!"
놀란 남편은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아니야, 나는 이걸 해낸 자기가 정말 너무 존경스러워."
갑자기 서운한 마음도 폭발했다.
"다른 남편들은 아기가 나오면 막 감격스러워서 운다는데, 자기는 왜 안 울었어?"
"울 새가 없었어. 갑자기 수술실로 가게 돼서."
그 뒤로도 나는 거의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수준으로 계속 뭐라고 해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불쌍하지만, 내 감정이 기댈 곳은 남편밖에 없었다. 나의 감정의 폭풍을 있는 그대로 맞은 남편은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이 모든 걸 우리 좋은 과정이라고 생각하자."
"과정이고 뭐고 간에 너무 하잖아 이건."
"이런 힘든 과정이 있었기에 더없이 건강하고 소중한 아기를 만나게 된 걸 거야. 더 좋은 날로 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우리 생각하자."
우리 부부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동안 생후 며칠이 지나지 않은 우리 아기는 자고 있었다. 그래도 엄마 감정을 쏟아낼 여유는 주는구나. 휴, 우리 부부는 그렇게 울다가, 잠든 아기를 바라보며 마지막 모자동실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아오, 모자동실.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니, 이건 정말로 지나가는 과정이긴 했다. 우리는 과연 어떤 날로 가게 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기는 우리를 조금 더 소중하고 행복한 나날로 이끌어 주고 있다는 것. 더 좋은 날로 우리는 갈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