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녁

잊어서 잊은 게 아닌데, 그냥 잊어버리는 저녁이 있다.

by 수페세

엄마는 어떤 분이셨어? 예쁘셨다. 키가 크고 조용하고 느리셨다. 느리게 움직이는 건 엄마의 특징인데 아버지는 이게 항상 불만이셨다. 나존하다.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표현이다. 나존하게 걷고 나존하게 말하고 나존하게 밭을 매셨다. 나존하다. 사전에도 안 나오는, 이 말의 정확한 표현을 모르겠다. 그냥 소리 나는 대로, 나존하다로 적는다. 느리고 활기가 없다는 의미다. 엄마는 피부가 하얬고 키가 컸고 젖이 적었다. 젖이 적어서 우리 사남매는 흰염소젖이나 암죽, 깡통분유로 자랐다. 여름날 마당 펌프에서 목물을 해드릴 때 엄마 등에 점이 몇 개 있었다. 등이 하얘서 그게 더 도드라져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비 오는 날 어두컴컴한 정지에서 국화빵을 굽던 일. 외손주 업고 서울 불광역 지하철 계단을 느릿하게 오르던 뒷모습. 주말에 집에 오면 숲골 콩밭 가운데 꽂혀 있다 허리를 펴며 오니야, 하시던 목소리. 봉고차 뒷자리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며, 한약방 쇼핑백 돈뭉치를 안고 몰래 마주보며 웃던 일.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지금. 엄마 가시고 한동안 모습이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하려 해도 눈은, 입은, 목소리는, 옷차림은 어땠는지 머릿속 하얗게 흐릿하기만 해서 생각이 하나도 안 났다. 그런데, 지금에사 선명히 다 생각나네. 아주 작은 것까지. 아지매 파마, 닳은 순금반지, 햇볕에 타서 벌겋게 변한 목덜미와 잔주름, 쥐젖 몇 개, 금니를 덧댄 치아까지도. 하얀 꽃상여, 흰 국화. 허연 삼베옷. 꼭 20년이 지났다. 20주기가 엊그제였다. 생각해 보니. 뭐 하느라 그랬나. 젯상에 홀로 술 붓고 앉았을 아버지도 서운한 전화 한 통 없으시네. 늘 그랬으니 다 큰자식 또 그러나 했겠지. 이제 정신이 드나 보다. 잊은 게 하나씩 생각 나다니. 에이 참, 에이 참. 자꾸만 혀를 차게 되는, 이러한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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