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맵을 보다보면 머잖아 구글이 세계를 정복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좋아한 수업이 있다면 단연 지리였다.
국토지리나 세계지리 과목은 거의 만점이었다. 중학교 때 사회교사 덕분이었다.
코밑이 가뭇한 시골 소년들 앞에서 뭘 얻을 게 있다고 으스댈까 싶던, 합죽한 얼굴의 남선생.
다른 건 몰라도 그의 남다른 수업 방식은 마음에 들었다.
이를테면 “자, 다들 사회과부도를 펴라. 오늘은 어디를 가볼까? 대전에서 시작하자. 손가락으로 따라 짚어라. 4번 국도를 찾았으면 남쪽으로 옥천, 뭐가 보이지? 구불구불한 금강. 여긴 피라미와 잡고기가 많이 잡히니 어죽과 도리뱅뱅이가 유명하다. 맛있겠지. 옥천은 육영수 여사와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다. 향수라는 시, 아는 사람? 모르면 됐고. 다시 오른쪽 아래. 우리는 지금 막 영동에 도착했다. 내 생각에는 전국에서 가장 맛있는 포도가 여기 학산에서 난다. 달이 머물다 간다는 월류봉을 지나면 바로 추풍령 나오지? 박통이 경부고속도로를 닦을 때…” 이런 식의 수업이었다.
사뭇 박식하고 언변이 좋지 않으면 절대 진행할 수 없는 수업.
그의 유창한 스토리 내레이션 덕분에 우리는 실제로 차를 타고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선생 목소리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곳의 풍경들이 눈에 선히 그려졌다.
그렇게 각인된 공부는 오래 잊히지 않았다. 현대사의 불행한 현장 노근리가 영동 황간면에 있다는 것, 경부선과 호남선이 갈라지는 회덕 인근 신탄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담배 제조공장이 있고,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의 텅스텐 광산이 영월군 상동에 있다는 등의 자잘한 지식부터 구미의 금오산 능선은 김천 쪽에서 보면 박정희 누운 옆얼굴 모양이라는 둥 근원을 알 수 없는 속설까지.
이렇게 익힌 잡다한 지식은 살면서 아주 가끔은 쓸모가 있었다.
결혼 전 아내와 데이트할 때, 지인들과 여행할 때.
약간의 스토리텔링만 가미해 떠들기만 하면 듣는 이의 경이로운 눈빛을 돌려받기란 어렵지 않았다.
뭐든 감사히 받으면 버릴 게 없는 법이다.
요즘, 자기 전에 누워서 구글맵으로 세계 여행을 즐긴다.
너덜너덜한 사회과부도에서 최신 아이패드로, 디지털 덕분에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출장이나 여행으로 가본 곳들과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을 핀으로 지정해 두고 길과 도시를 천천히 살펴본다.
밤마다 지도 앱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를 아내는 신기한 눈으로 흘겨본다.
민망한 끝에 기발한 대답이 생각났는데, 그 후로는 어서 끄고 자라는 잔소리가 그쳤다.
“나중에 당신과 여행할 곳을 미리 찾아보는 중이야. 괜찮지?”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TV 여행 프로그램에 열광한다.
재방송이라도 한 편 보고 나면 으레 구글맵으로 길을 찾아본다.
언젠가 가게 된다면 프로그램을 다시 보게 되겠지.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방송사 홈페이지에 가니 구글맵을 기반으로 그간 방송된 프로그램을 나라별, 도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두었더라. 지도에 표시된 지역을 선택하면 관련된 방송을 다시 볼 수 있다.
이렇게 좋은 세상이라니 누군들 일상의 여행을 선망하지 않을까.
지형과 명소와 작은 골목들, 현지의 사진과 장소에 대한 세계인의 평가까지 결합한 구글맵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게 느껴져서 요즘은 구글이 머잖아 세계를 정복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구글이 세계를 정복하기 전에 지도 앱으로나마 자유로운 여행을 충분히 즐겨야지.
요즘 관심을 두고 찾아보는 곳은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다.
날개를 편 거대한 제트기 형상으로 건설된 사막의 계획 도시.
친하게 지내던 이가 곧 선교사로 떠날 곳이라 마음이 가서 그러는 것인데 내가 갈 것도 아니면서 자청해 그곳의 지역 정보와 역사, 문화 공부를 자연스레 해보게 된다.
지도만으로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생산적인 취미활동이라니. 날마다 더하는 상상력으로 베갯잇이 젖는다.
지도 하나로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이야기 소재는 보물 지도일 것이다.
누구나 통과한 그 시절 수많은 공상과 모험의 세계가 그 안에 있다.
해적이 숨겨놓은 보물 지도 이야기. 낡은 양피지를 난로에 비추면 비로소 나타나는 미지의 섬과 수수께끼의 기호. 모험과 친구들. 고난의 여정과 극복의 스토리를 통해 우리는 이렇게 성장했다.
비록 지금은 잊었다 해도 그렇게 지도가 우리를 키웠다.
그러니 거창하게 말한다면 지도는, 대지의 방향과 위치, 거리를 축적하는 기능을 넘어 인류의 교양을 육성하는 방대한 지적 자양분을 포함한다.
자동차잡지 기자로 일할 때 가장 신나던 업무는 시승기 촬영이었다.
지역을 정하고 길의 구간을 짚고 촬영 장소를 잡을 때 나는 언제나 팀의 선생이 될 수 있었다.
시승기에 쓸 주제와 이야기도 대개는 미리 끝내두었다.
거기에 신차의 승차감과 옵션 사양만 더하면 썩 괜찮은 기사 하나가 마무리 되었다.
지도를 읽으며 마르고 닳도록 도로를 예습한 덕분이었다.
예상한 곳, 계획된 일정으로 움직이는 작업과정은 언제나 쉽고 깔끔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표시된 도로와 도시, 산맥과 등고선 말고도 더 많고 많은 이야기가 지도에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쩌다 곁길로 샜을 때 만나게 되는 예기치 않은 풍경과 에피소드. 어쩌면 모험이라 불러도 좋을 경험들 말이다. 삶이 늘 그러하듯,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영 나쁜 것만은 아니듯.
몇 해 전, 강원도 평창에서 양양으로 산길을 넘던 중 문득 눈에 들어온 임도를 따라 들어갔다가 오대산 자락에서 인터넷이 끊겨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켜놓고도 길을 잃은 적이 있다.
길이야 눈앞에 있고 지도도 있었지만 방향을 놓쳐버렸다.
전파가 끊기자 디지털 안내자가 맥을 놔버린 탓이었다. 진땀을 흘리며 길을 헤매다 밤중에 부연약수 표지판을 만났는데, 민가 불빛이 그토록 반가운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일 우연히 또 겪고 싶다.
게을리 누워 지도 앱을 보며 기대하는 상상이다.
사진: 구글지도 PC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