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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Sep 13. 2020

신동으로 산다는 것

뭘 그런 것까지 잘하냐고? 몰라, 그렇게 생긴 걸 어떡해?

나는 구구단 신동이었다.

유치원 문 앞에도 못 가봤는데, 이일은 이 이이는 사를 외웠다.

뿐만 아니라 읽기 신동이었다.

5살 무렵에 이미 갸거겨를 깨치고

누나의 교과서는 물론 아랫채 창고의 비료포대에 쓰인 깨알 같은 글귀까지 읽어치웠다.


나는 꽃 이름 외우기 신동이었다. 꽃을 보면 이름이 생각났다.

시골 출신이라 그렇겠지. 누군가 빈정댄다.

하지만 시골 출신이라고 모두가 식물 이름, 벌레 이름, 들꽃 이름을 꿰고 있는 건 아니다.

내 친구들은 똑같이 논두렁 밭두렁에서 뒹굴었어도 여뀌와 고마리와 며느리밑씻개를 구분하지 못한다.


내가 어느 정도로 꽃 이름과 그 유래를 잘 알았냐면, 심지어 꽃 이름 하나 잘 외 결혼까지 잘했다.

연애 시절... 아, 아니. 연애도 아니었고 단지 소개받아 만나기 시작한 그 사람은,

평소 '예쁜 여자와 결혼하'라는 단순 명료한 인생 목표를 갖고 있던 내게

꿈을 실현 대상으로 안성맞춤인 절세미인이었다.


그 사람에게 잘 보일 기회가 도무지 없었는데

지갑에 돈마저 없어서 만나면 칼국수 한 그릇 먹고 길바닥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그 사람은 평생 먹을 칼국수를 이때 다 먹어버렸다고 나중에 말했다)

그때도 길을 걸었다.

마침 초여름이라 길가 꽃들이 가득  피었고, 노란 꽃 무더기가 나타나자 그 사람이 중얼거렸다.

"어머나, 노란 꽃 이쁘기도 해라."

나는 잽싸게 길을 막고 말했다. 이 꽃 이름이 애기똥풀이에요.

그러자 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애기똥... 이요?"

이것 좀 볼래요? 나는 꽃 모가지를 뚝 꺾어 내밀었다.

무참히 잘린 줄기에서 노란 액체, 아기의 배냇 똥 같은 묽은 체액이 흥건히 흘러나왔다.

"아하, 정말 애기똥 같네요. 신기해라."

그런데 어쩜 그런 것도 잘 알아요?라고 묻는 그 사람의 눈동자가 하트 모양으로 변해 있는 걸 그때 보았다.

꿈은 이루어졌다.



나는 또 골프 신동이었다.

오래 다닌 회사를 퇴사하고 뒤늦게 골프를 시작했는데, 

백수가 된 나에게 클럽을 쥐어주며 중독의 세계로 인도한 골프 선배는 

내가 연습장 레슨을 끝내고 인도어에 가서 첫볼을 날리자 

물개 박수를 치며 "신동이 나셨네"라고 또렷하게 말했다.

뿐만 아니라 옆에 서 있던 싱글 골퍼마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야 이제  배드민턴 신동이다.

클럽 회원 모두가 나의 무서운 성장세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비기너의 반란에 구력 쟁쟁한 선배들은 패배의 후유증으로 앓아눕거나 

멀쩡한 라켓을 당근마켓에 팔아버릴 정도였다.

레슨은  한 달 받았을 뿐인데, 더 이상 코치에게 배울 게 없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무릎이 아파 배드민턴을 그만두었는데 나아지긴커녕 통증이 심해 걷지 못할 지경이 되었기에

에라 모르겠다, 이를 악물고 무릎 재활을 병행하며 배드민턴을 주야장천 쳤더니 

웬걸, 무릎 통증이 싹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나는 배드민턴에 최적화된 신체로 태어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든에도 문제없이 을 휘두를 것 같다.


그 밖에도 물수제비 뜨기, 송편 만두 빚기, 파스타 삶기, 쏘가리 낚시질, 볼펜 돌리기, 혀로 침 풍선 날리기, 훌라후프 돌리기, 아재 개그 끝없이 하기, 바둑알까기, 다트 던지기 등등

신동으로 불릴 만한 재주는 많지만, 너절한 잡기에 대해선 일절 함구하기로 한다.


신동으로 사는 삶이란 고고하지만 외롭기도 하다.

많은 이들의 질시와 견제를 견뎌야 하기 때문에.

평범함 자체가 숙명인 줄 알고 사는 뭇사람들은 신동의 삶을 결코 공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만일 이 글을 읽고 문득 배알이 꼬이거나 헛웃음이 나고, 심지어 원인 모를 구역질을 느낀다면

당신도 어쩔 수 없는 평범한 뭇사람이다.

더구나 이 말에 인정이 안 된다면, 거의 틀림이 없다고 보면 된다.


(2020년 7월 7일에 든 거의 놀라운 생각)


Photo by NASA on Unsplash


** 이 글을 읽아내가 추가로 확인해준 나의 신동적 재주는 다음과 같다: 양말 아무 데나 벗어놓기 신동. 늦게 자기 신동. 나갔다 헐레벌떡 다시 들어오기 신동. 얼굴 쥐어뜯기 신동. 걸으며 방귀 뀌기 신동. 흘리며 밥 먹기 신동. 입맛 다시기 신동. 결정 못하기 신동. 길가다 유턴하기 신동. 한 번에 못 듣고 다시 묻기 신동. 물건 못 버리기 신동. 물건 못 찾기 신동. 화장실 오래 있기 신동. 샤워 빨리하기 신동...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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