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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Feb 09. 2021

안 키우는 게 사랑하는 것?

반려를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소유하고 있다.

한적한 서울 외곽으로 이사한 뒤 아내는 동네 사랑에 빠졌다.

집과 이어진 숲길을 매일 걷고 학교 주변 공터를 산책한다.


어느날부터는 길가에 휴지며 쓰레기가 떨어진 걸 한탄하더니 

종종 비닐봉지를 들고 직접 청소를 하고, 구청에 쓰레기 투기 단속 신고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자청하여 동네 환경지킴이로 살아간다.


가끔 아내가 분개하는 건 개 주인들 때문이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중 배변 뒤처리를 제대로 안 하는 이가 적지 않다.

특히 특정 시간에 시바견 두 마리를 데리고 나오는 젊은 여성은 상습적으로 똥을 안 치운다.

한 번은 운동을 하다가 잔디밭에서 거대한 변을 밟기도 했다.

안 치우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똥을 비닐봉지에 담아서 풀숲에 버리고 가는 짓이다.

아내는 그 길에서 여러 번 보았다 했다. 

치웠는데 다음날 있고, 치웠는데 똑같은 봉지가 또 있고.

같은 사람의 소행이다.

책임을 지지 못하면서 왜 개를 키우냐며 공연한 역정을 냈다.

모든 개 주인이 그러는 게 아니겠지. 하지만 그러는 사람이 많다. 무책임한 사람.


개 주인이라고 말하면 틀렸다며 용어를 교정하려 들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주인이 아니라 반려, 친구라고.


그러하다. 동물을 키우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개나 고양이는 반려(伴侶), 평생을 함께할 짝이니 주인과 종이 아닌 친구나 벗, 또는 가족일 터다.

그걸 반대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대상이 동물이든 식물이든, 나무든, 풀이든, 꽃이든, 돌이든, 장난감이든, 자동차든... 

의미를 부여하면, 이 무정하고 외로운 세상에 특정 동물과 사물이 애틋한 반려가 되기도 하겠다.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가 되듯.


언젠가 부자의 저택에 저녁 초대를 받은 적이 있는데 현관에 대형 수족관이 있었다.

갈치처럼 생긴 우아한 물고기, 아로와나 한 마리가 수면을 헤엄치고 있었다.

어린녀석을  120만 원이나 주고 사온 홍룡이라 했다.

귀뚜라미를 몇 마리 넣어 주자 아로와나는 꼬리를 퍼덕이며 싱싱한 간식을 힘차게 삼켰다.

살아 있는 먹이만 먹는다 하니 한겨울 귀뚜라미 파는 곳에서 일부러 사왔다 했다. 

다른 수족관에는 금붕어떼가 있었는데 아로아나의 먹잇감으로 기르는 것이라 했다.

하나의 존재를 기르기 위해 다른 생명은 무시되어도 좋은가 하는 문제. 

그때는 생각을 못했다.


아로와나가 반려이면 귀뚜라미는 무엇이고 금붕어는 무엇인가?

뱀을 위해 흰쥐를 기르면 그 쥐는 어떤 신세인가?. 쥐에게는 공감 능력이 있다는데.

그러니 어디에 어떤 의미를 두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타인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인간도 자식에게는 눈물겨운 헌신과 사랑을 보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어디다 의미를 둘 것인가? 당신은 인생의 무엇에 의미를 두는가?


전국 강 바닥을 헤매며 좋은 돌을 찾으러 다니는 은퇴 공무원. 

돌을 찾아 배낭에 메고 와서는 씻고 닦고 기름칠하고 틀에 세워놓고 감탄한다.

산에서 나무를 캐와 자르고 가지를 비틀고 길러 분재로 키우는 금융 은퇴자도 알고 있다.

가져와 만들고 다듬고 기르며 의미를 부여하고 감탄하고 완상하는 것.

돌도 나무도 반려가 된다. 그들에게 가족 못지 않은 귀한 존재들이다.

귀한 술을 모으는 사람. 특별판 한정판 패션 아이템을 사려고 밤새 줄 서는 사람...

너무 멀리 가지는 말자.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생각을 멈춰 본다. 


그냥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떨까? 그대로 두면 어떻게 될까?

동물을 기르며 무정한 자들의 동물 학대 뉴스에 울분을 쏟아내거나 생명 윤리를 토로하기  전에 

그냥, 안 기르면 되지 않을까?


이 주장이 과격하고 도를 넘은 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기르고 말고는 본인의 결정이고 권한이니 그럴 수는 없다 하자.

그래도 책임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지 않을 책임.

무엇보다 반려라 부르는 대상을 진짜로 존중할 책임. 그들의 권리를 진짜로 보호할 책임.

반려란 의미는 상호적인 것인데. 실제로는 전부 인간의 관점으로 쓰이고 있다.  


단순히 내가 상대를 귀하게 여긴다고 하여 상대가 반려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르는 행위에 동물, 식물의 입장이나 결정권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거리의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주고,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놓아두는 행위도 그렇다.

사실, 냉정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게 옳은 것이다.

(버려지거나 조난 당한 동물을 구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돌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나무도 있는 자리에서 뽑지 말고...

동물도 길러서 분양해서 기르지 않고, 놔두는 것이 정치사회윤리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다.


애완에서 반려로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달라지는 개념이나 가치가 아니다.

동물들이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살지 어떻게 생활할지 어떻게 보일지... 

심지어 생식기능과 성대를 제거할지 말지 이것은 순전히 인간들이 결정하며 

지극히 인간의 관점이고 인간을 위한 행위인 것이다.


이것에 간섭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데려와서 보호하고 가꾸고 길러야 존중이고 배려인 것인가?

이것은 마치, 아프리카에 크리스마스가 없어서 흑인들이 불행할 거라고 생각하는 

백인의 관점과 유사하지 않은가?


동네 개 주인들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멀리 왔다. 

한 번은 생각해 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한 집 건너 동물을 기르는 시대가 된 이 시점에서는 짚어봐야 할 문제라 생각한다.


아래는 웹 검색에서 참고 삼아 가져온 자료들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든 아니든... 생각할 여지를 준다.


보도에 따르면 (영국 The Guardian) 올해(2020년) 초 영국에서 이루어진 한 조사에서 자신의 애완동물을 배우자보다 더 사랑한다고 답한 사람은 12%, 아이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답한 사람은 9%, 가장 친한 친구보다 더 사랑한다고 답한 사람은 24%였다. 다른 조사에서는 애완동물을 소유한 영국인의 90%가 이들을 자신의 가족으로 여긴다고 답했으며 16%는 2011년 인구 총조사에서 이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포함했다. 영국의 애완동물 산업 시장은 15조 원에 달하며, 2016년 미국인이 애완동물을 위해 쓴 돈은 70조 원이 넘는다.

- 인터넷 뉴스 검색 자료


"가축에서 애완, 그리고 반려가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세기만 해도 가축이었고, 1960년대만 해도 미국인들은 휴가를 떠나기 전 어딘가에 개를 맡기는 대신 개를 죽이고 돌아와서 새로운 개를 사곤 했다. 왜냐면 그 편이 더 쌌기 때문이다. "

- 버나드 롤린(수의사)


"우리가 동물에게 더 많은 권리를 부여할수록 우리는 그들의 삶에 관여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할 레르조그(웨스턴캐롤라이나대학 교수, 심리학자,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연구하는 인간동물학(anthrozoology) 전공)



냉정하게 말해보자. 반려를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동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개 주인'이 틀린 말은 아니다. 교정하지 말라. 우리의 의식을 교정하자.


Photo by Matthew LeJune on Unsplash



** 예민한 주제라 올리면서도 조심스럽긴 하다. 단지 내 생각이니까. 딴지는 한사코 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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