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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May 28. 2021

잡지의 시대

이제는 잡지를 떠났기에 조심스러운,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잡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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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집에 오니 현관에 이달 치 잡지 세 권이 와 있다. 손도 안 씻고 뜯어 읽는다. 늘 가장 먼저 읽는 편집장의 글. 이상하게도 모두 이별 이야기로 가득하다. 같이 일하던 기자들이 떠난다는 이야기. 아쉬운 고별사. 그간 애썼다고 무운을 빌어주는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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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자주 보이는 것. 내부 사담. 이런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인사 이동 같은 커튼 뒤 이야기를 시시콜콜 쓸 이유가 없다. 써서는 안 된다. 지면의 지나친 사유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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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의 잡,은 잡다하다는 뜻도 되지만 여럿을 한데 모아 놓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정한 누군가, 설령 그 사람이 편집장이라 해도 그가 있으나 없으나 잡지는 변함 없어야 한다. 개인의 산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잡지가 신비로워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내부 종사자의 나고 듦을 지면에 토픽으로 기술하는 건 스스로 권위(Authority)를 떨어뜨리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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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잡다한 정보 모음집쯤으로 해석하는 자를 경멸한다. 한 권의 잡지는 철저히 의도된 설계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매체는 개인이 아니다. 권위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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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잡지의 권위가 떨어진 지는 비교적 오래 되었다. 변화한 미디어 환경을 탓하지만 비겁한 핑계다. 잡지의 고난이 트렌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시작된 게 아니다. 오히려 어설프게 변하려다 주화입마에 빠진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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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환경이 변하면 덩달아 변할 게 아니라 잘 하는 부분, 잘 하고 있는 부분,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극대화해야 마땅하다. 변화라는 이름으로 허둥지둥 따라하다 자칫 멸망한다. 장날이라니 거름 지고 장엘 간다. 불안하기에 두는 패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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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눈빛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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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많든 적든 독자가 잡지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 형태가 무엇이건 간에 기대의 바탕에는 신뢰가 있다. 믿을 만하다는 것. 권위는 신뢰에서 나온다. 변화가 아니라 변함 없다는 것에 독자는 안심한다.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그것을 생각 안 한다. 변화해야 살아남는다는 말이 늘 옳지는 않다. 분위기에 떠밀려 하는 억지 변화는 그 끝이 구렁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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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를 대체해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재미와 정보? 그것도 중요하겠지. 하지만 모든 콘텐츠가, 모든 매체가, 모든 형태의 저널이 재미와 정보를 동시에 줄 수는 없다. 게다가 재미는 제한적이며 모두에게 일괄 적용되지 않는다는 함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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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속 30센티로 엄지 스크롤 하며 습관처럼 누르는 '좋아요' 숫자가 절대 선, 절대 권위인 줄 착각하는 혼돈의 시대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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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Motor Trend>의 자랑스런 기치는 세계 최고 권위의 자동차 잡지(The World's #1 Automotive Authority)이다. 스스로 최고라고 말하는 것만큼 권위 없는 건 없다. 그렇대도 <모터 트렌드>에는 지난 수십 년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다. 특히 1949년 창간 이래 세계 최초로 선정하기 시작한 '올해의 차(Car Of The Year)'는 거의 모든 자동차 매체(심지어 신문지마저)가 이름(COTY)을 따라 할 만큼 권위가 대단했다. 지금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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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창간한 한국판 <모터 트렌드>의 목표도 마찬가지였다. 업계 최고 권위를 유지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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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해 쓰려 한 건 아닌데 말이 길어진다. 다만 권위는 '권위적'이라는 말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겨우 말하고 싶다. 권위가 사라진 저널은 죽은 사자다.(죽지 않으면 하이에나가 되겠지. 진짜 하이에나에겐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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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권위적으로 변한 미디어도 죽어 버린다. 말빨이 먹히지 않는 재담은 지겨울 따름이다. 말빨이 안 서니 재담으로 흐른다. 재담도 안 되면 진한 화장술로 둔갑을 시도한다. 그것이 진보요 변화인 줄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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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누구와 긴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업계의 잡지가 사라지고 있는데 자동차 잡지는 꽤나 오래 간단 말이에요. 왜 그럴까요? 글쎄, 왜 그럴까 잡담을 나눴지만 개운한 이유를 알아낼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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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를 알아낼 순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안다. 오래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연명 중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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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던 스포츠카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했다." 이건 페리 포르쉐의 유명한 말. "좋아요 숫자를 늘릴 짧고 매끈한 화보 위주의 잡지를 만들 편집장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 찾기로 했다." 이건 어제 읽은 잡지의 놀라운 서문.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이건 전문가의 권위를 강조하는 금과옥조. "믿지 않으려면 뽑지 말고 뽑았으면 믿고 맡겨라." 이런 이상적 교훈. "이끌거나 따르거나 비키거나."  이런 멋진 충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건 신약의 황금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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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황홀하고 다단하지만 귀결은 한 문장; The era is over. 무심히 한 시대가 닫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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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이래 가장 충격적인 페이지를 내가 창간한 잡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존재의 종언을 자백하는 놀라운 선언이다. (이건 나중에 따로 공개하려 한다. 안 할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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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잡지의 권위로 바꾸려다 그냥 둔다. 무슨 상관. 이제 있거나 말거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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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을 여러 번 고쳐 썼다. 글에 감정이 뒤섞인다. 하는 수 없다. 내 마음이고 내 책임이다.


Photo by Charisse Keni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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