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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Oct 27. 2021

딸의 아빠 인터뷰

어느 날 딸이 인터뷰 좀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늦은 밤 거실 안락의자에 늘어져 앉아 있는 시간이 좋다.  매일 그렇게 한다.

피로를 즐기며 아무 일도, 아무 생각도, 아무 숙제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누린다.

며칠 전, 그렇게 하고 있는데 방문이 열리고 딸아이가 나왔다.

주방에 가서 물을 마시고는 웬일로 쭈뼛쭈뼛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아빠 부탁이 있어요, 한다.

그래 놓고는 이내 아, 아니다. 아니에요. 한다.

뭔데 그래? 했더니... 음, 아빠 좀 인터뷰해도 돼요? 한다. 아빠를? 응. 아빠를...

이렇게 하여 주방 식탁에 앉아 딸과 심야 인터뷰를 하게 됐다.

질문하고 대답하고 받아적고 하느라 두 시간이나 걸린 딸과의 인터뷰.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래는 딸이 (어느 웹에) 작성한 '아빠 인터뷰' 원고 전문이다.


***


에디터 :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인터뷰 요청에 잠옷 바람으로라도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자기소개를 먼저 부탁드릴게요.


섭 : 인터뷰어가 아니라 인터뷰이가 되는 건 오랜만이네요. 저는 현재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와 관찰하는 일을 좋아합니다. 글 쓰는 일은 힘들면서도 좋아요. 잘하고 싶어서 힘들고, 다 쓰고 나서의 만족감 때문에 좋은 거죠. 아, 뒤늦게 배드민턴에 빠지기도 했네요.


에디터 : 자기소개를 할 때 하고 있는 일보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신 분은 처음이라 신선하네요. 직업으로 글 쓰는 일을 25년 이상 해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글 쓰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나 계기가 있나요?


섭 : 초등학교 4학년 땐가. 아직도 기억나요. 여름 방학하던 날이었는데 엄청 뜨거운 날이었죠.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서 가정통신문을 읽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써주신 평가가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이 어린이는 글짓기에 소질이 있다." 그 이후로 글 쓰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에디터 : 운명이었나 봐요. 25년 이상 쌓아오신 글쓰기 비결도 궁금한데요?


섭 : 음... 몇 가지 규칙이 있긴 하죠. 먼저는 첫 문장이 좋아야 한다는 것? 첫 문장은 독자의 멱살을 잡거나 팔꿈치를 비트는 일과 같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번째는 가능한 단문으로 끝내려고 하는 것. 마지막으로 멋 부리지 말자는 것.


에디터 : 첫 문장을 잘 쓰자! 정말 공감돼요. 저도 첫 문장이 잘 나오면 그 뒤로 술술 풀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쓴 글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첫 문장은 무엇인가요?


섭 : 오... 그렇게 물으니 어려운데요? 음, 일단 생각나는 건... "잊어서 잊은 게 아닌데 그냥 잊어버리는 저녁이 있다."


에디터 : 글 쓰는 일을 사명이라고 느낄 정도라면, 글을 통해 이루고 싶은 일도 있을 것 같아요. 글로써 뭔가를 바꾸고 싶다거나?


섭 : 사회적인 영향력이나 물결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 건 없어요. ㅎㅎ 그래도 소망이 있다면 독자가 읽고 나서 따뜻함이라든지, 약간의 슬픔과 같은 정서적 울림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폭력적이거나 메마른 글은 안 쓸 거니까요. 울리기 위해 쓴 글은 아닌데 누군가 읽고 감동해 울었다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기쁘죠. 감정이 밀접한 끈으로 연결되는 거잖아요. 글도 일종의 미디어인데, 그것을 타고 연결된다는 건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에디터 : 보통 어릴 때부터 한 가지 직업을 꿈꿔온 사람들은 성취하고 싶은 일이 있기 마련이잖아요. 예를 들어서 꼭 스릴러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 뭐 그런 버킷리스트와 같은 글을 써보신 경험은 있나요?


섭 : 음... 에세이보단 소설을 쓰고 싶어요. 단편은 써봤지만 장편소설은 아직 못써봤네요. 또 인물 평전을 쓰고 싶어요. 인물에 대한 묘사는 언제나 즐겁기도 하고 또 잘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3명의 인물평을 썼어요. 죽은 내 친구들이죠. 젊은 나이에 떠난 친구들에 대해 지극히 주관적인 기록이라도 남기고 싶었어요. 그들에 대한 감상은 아니었지만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 세대의 언어를 기록하고 싶어요. 아직은 결심만 한 상태죠. 지금은 경험하기 어려운 말투라거나  정서가 있잖아요. 그 세대가 가면 사라질 풍성한 말들을 기록하고 싶어요. 시골 마을 이름, 바위 이름, 길들 또 그것에 얽힌 전설들. 사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겠지만, 어쩌면 쓸모없는 일인지 몰라도 그걸 기록하고 남기는 건 쓰는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언제나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고 믿어요.


에디터 : 그럼 지금 당장 소설을 쓴다면 어떤 내용을 쓰고 싶으신가요?


섭 : 평범한 인물이 삶을 누리고 극복하고 휩쓸리며 사는 얘기를 쓰고 싶은데... 구체적이지 않아서 못 쓸 것 같네요. 연애소설을 써보고 싶기도 해요. 심리를 묘사한 글이 재밌거든요.


에디터 : 인터뷰를 하다 보니, 평범한 일들에 대해 관찰하고 사유하는 걸 중요시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타고나셨나요? 아니면 바뀐 계기가 있나요?


섭 : 원래부터 타고났을 수도 있죠. 근데 깨달은 건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대부분이 흐릿하지만 유독 어떤 기억은 아주 상세하게 묘사가 가능할 정도로 떠올라요. 바람의 맛까지도 표현할 수 있을 정도죠. 사실은 왜곡된 기억이에요. 누구나 어느 정도는 과거를 나름대로 각색해서 드라마틱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언젠가 "나는 그때 뽕나무 아래에서 죽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오디를 따러 뽕나무에 올라갔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떨어져 기절한 사건인데, 깨어나 보니 저를 내려다보던 동생들의 얼굴이 보였죠. 그 걱정스런  표정에 대해 썼어요. 그 장면이 선명해요. 눈물 그렁그렁한 까만 눈동자, 까만 얼굴, 오디를 먹어서 덩달아 까매진 입술 같은 것들이요. 의도된 관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경 몇  미터 이내의 것들을 가능한 인식하는 과정을 가지려고 해요.


에디터 : 관찰과 기록을 중요시하신다면 일기도 쓰실 것 같아요. 실제로 일기를 꾸준히 쓰신다고 들었는데, 솔직하게 쓰시나요?


섭 : 어느 정도는? 안 좋은 말, 불쾌한 기분도 쓰니까요. 일기는 습관적으로 쓰는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가 하루에 무엇이라도 기록하자는 결심을 했는데, 그 최소한이 일기인 셈이죠.


에디터 : 그럼 그 일기를 남에게 공개할 수 있으신가요?


섭 : 물론 보여줄 수 있죠. 말하지 못할 비밀 같은 건 없어요. 일기는 일상 기록 중심으로 써요. 군대에서부터 썼던 것 같아요. 에세이처럼 감상은 아니고 감정과 사건 중심으로요.


에디터 : 일기만큼 주변 사람에게도 솔직한 편인가요? 그러니까,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말이에요.


섭 : 진짜로 어려운 일은 잘 얘기 안 하죠. 터놓고 얘기할 때도 있지만요. 말하다 보면 정리가 돼요. 그럴 때의 단점은... 상대방이 내가 지금 하소연을 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고. 내가 말하면서 각색을 하고 있구나, 느껴져서 후회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솔직한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솔직히 말해서"라는 말을 즐겨 쓰는 사람을 피하는 경향이 있기도 해요.


에디터 : 사람을 묘사하는 일을 좋아하고, 또 잘한다고 하셨는데요. 딸이 있으시다고 들었어요. 딸에 대해서 묘사해본다면?


섭 : 지극히 주관적으로는 놀라운 존재? 사실 태어났을 때부터 놀라운 존재였죠. 의사가 큰애한테 분명히 "동생 태어나면 딱지치기하고 놀아라"라고 했거든요. 보통 딸한테 하는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들인 줄 알았는데 태어나니 딸이었던 거죠. 세상에 나한테 딸이 있다니? 그 사실 자체가 놀라워요. 딸은 까칠하고 예민하지만 뭐, 마냥 무던한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고요. 뒤늦게 안 사실인데, 가만 놔두면 더 잘해요. 자식을 가만 놔둘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근데 가만 두면 언제나 저 알아서 잘하더라고요. 존재 자체가 굉장히 원만하지 않고, 그게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고집이나 관점이 분명해 보여서 좋아요. 휘둘리거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언제나 스스로의 잘하는 점과 약점을 잘 구분하고 있고요. 고마운 건 이 나이가 되도록 아빠랑 사이좋게 지내준다는 거예요. 그 사실이 언제나 아빠를 행복하게 해 주죠.


에디터 : 이전 호에 발간된 인터뷰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아주 정반대의 평가를 내렸던 게 기억나요. 흥미롭네요.


섭 : 걔가 지 고모랑 비슷해요. 되게 반듯해 보이고 싶어 하는 강박이 있어요. 매사 경우 바르게 행동하려니 본인이 힘들기도 할 거예요. 밖에서 누가 걔를 까칠하다고 평가하겠어요? 그만큼 싫은 소리 듣는 걸 싫어해요. 그게 어릴 때부터 걱정이었죠. 자기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못 견뎌하고, 진짜로 못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땐 숨더라고요.


에디터 : 딸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니 따님이 좋아하시겠네요.


섭 : 걔한텐 비밀로 해주세요.


에디터 : 딸에 대해 의외였던 점이 있다면요?


섭 : 음... 생각보다 더 잘한다? 부모는 항상 자식이 조마조마한 마음이 있어요. 불쌍한 마음도 있고요. 애틋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할까요? 늘 어리고 덜 자란 것 같고. 그런데 삶을 대하는 태도나 자세를 보면 이렇게 컸나? 싶을 때가 있어요. 나쁜 짓만 아니라면 새로운 시도를 계속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아, 시집을 읽는다는 것도 의외였어요. 나중에 "위트 앤 시니컬"을 꼭 같이 가보고 싶네요.


에디터 : 따님한테 시간 좀 내라고 전할게요. "어떻게 그렇게 아빠랑 잘 지낼 수 있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데, 비결을 공개해주실 수 있나요?


섭 : 혼자 잘해서 되는 건 아니죠. 어쨌든 사랑을 많이 주려고 했어요. 애기 때부터 "아빠는 무조건 네 편이야"라는 말을 자주 해줬고요. 딸은 고등학생 때까지도 스스럼없이 아빠 옆에서 잤어요. 그러면서 책도 많이 읽어주고, 여행도 자주 다니고 했어요. 도덕적으로 나쁘지만 않으면 뭐든 다 해주려고 해요.


에디터 : 딸의 재수 시절, "학원비가 이렇게 비싼데 또 떨어지면 어떡해?"라는 딸의 말에 "떨어지면 또 하면 되지. 걱정하지 마."라고 대답해주셨어요. 그때 심경이 어떠셨나요? 정말 떨어져도 괜찮으셨나요?


섭 : 물론이죠. 0.1초의 고민도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누군가는 저에게 반문하기도 해요. 독립심을 키워주는 게 맞지 않냐며. 그래도 뭐... 내가 능력이 있고 돈이 있다면, 아이들 나이가 40이 되더라도 도와주고 싶어요. 내가 옛날만큼 안정적이지 않아서 문제인 거죠. 언젠가 SNS에 아이들 어릴 때 사진을 올렸더니, 동창 한 명이 "애고, 우리가 뭐 땜에 살겠노"라고 댓글을 남겼더라고요. 자식을 위해 산다는 말은 웃기지만 분명 가치 있고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에디터 : 에디터의 눈물샘 비상사태로 인터뷰는 슬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섭 : 이런 인터뷰 좋은 것 같아요. 다른 가족들도 했으면 좋겠네요.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시도해라? 그 일을 좋아하는지, 꾸준히 할 수 있는지, 잘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2021. 10. 18. 월요일. 비)


사진 : Leio-Mclaren-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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