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되어버린 사랑

어렸을 때 많이 해봐야 하는 '일'

by 수피

당근마켓에 저렴하게 올라온 책을 사려고 동네 앞에 쭈뼛쭈뼛 서있던 날이 떠오른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걸 보니 나에게 꽤나 인상 깊었나 싶다.


당연한 일이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추위에 떨며 판매자만을 기다리던 초라한 나의 앞에 또래 여성이 나타났고 그녀가 나의 애인 유무를 궁금해한다니...



"그래서 따로 만나봤어?!"


항상 이런 이야기에 호기심 많으신 카페 사장님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물어보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는 나였지만, 이런 자랑(?)스러운 얘기는 가끔 한다. 입이 간질간질하니까..


"아뇨.. 제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재밌는 주제에 재미없는 결말. 최악이다.

좀 재미있는 로맨스 이야기를 만들어왔어야 했을까? 아니면 애당초 이런 재미없는 결말은 얘기조차 꺼내지 않는 게 좋은 선택이었을까. 항상 그랬듯 말을 꺼내놓고 후회한다. 입이 방정이다.


"만나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야.. 어렸을 때 연애 많이 해봐야 된다. 후회 안 하려면"


호기심 가득했던 아까의 표정과는 다르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후회하셨나 보다. 젊었을 시절 다양한 연애경험 없이 일찍 결혼하신 사장님은 그럴 법하다.


어렸을 때 (어리다는 범위조차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보통 20대-30대 초반 아닐까 생각해 본다) 연애 많이 해봐야 된다는 그 말이 나에겐 그렇게 좋은 조언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물론 자신이 후회하고 있는 감정을 공유해 주기 위해 나에게 조언해 준다는 것은 안다. 다양한 연애경험을 통해 사람 보는 눈도 기르고 연애 기술뿐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인간관계 기술을 허물없이 적나라하게 배울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해주시는 것..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렸을 때'라는 제한된 기한을 정하고 '다양한'이라는 많은 횟수를 필요로 하는 언어는 나에게 사랑을 ''로 받아들이게 했다.


여러 사람들의 사랑 이론, 경험, 조언 등 다 제쳐두고 오로지 사랑에 대한 나의 신념만을 두고 본다면, 내가 '사랑'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벌써 이십 대 초반이 다 지나갔으니 아직 연애를 몇 번 못해본 나의 청춘은 끝났어.. 흑흑

-나는 맨날 나만 좋아하는 연애만 하고 있는 것 같아.. 더 늦기 전에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만나봐야 되나?

-지금 나이는 미치도록 사랑할 나이니까 잠시 일은 제쳐두어야 할까?

-아직 한 번도 연애를 못 해봤는데 내 인생 왜 이럴까..

...


수 없이 많다. 연애를 주제로 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후회들.

읽어보면 느껴지겠지만 아까 말했듯 우리는 연애를 '일'로써 느껴지도록 자신도 모르게 압박받고 있다.


물론, 사랑을 갈망하는 것은 젊은이로서 너무나 당연하고 나 역시 젊은이로서 사랑을 갈망한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이 조언이라는 믿음 가득한 약상자 속의 주사기를 꺼내와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을 '불편한' 사랑의 감정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사랑'을 하는데 '불편'은 절대 끼어들어선 안된다. 자연스러워야 한다.




다시 돌아와 아까 당근마켓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면

내가 그녀를 거부한 이유는 자연스러운 행동의 증거였다.


내가 사장님의 조언을 조금 일찍 들었다면, 약간의 고민하는 시간이 생겼을 것이고 그 고민의 시간만큼 내 선택에도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불편함'속에서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


나는 그녀의 대시에 자연스러운 조건들을 형성했다.

-나의 이상형인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연관되어 있는가

-지금 내가 불편한가


딱 이 정도였다. 그렇게 보니 나는 그녀와 밥 한 끼 먹는 것조차도 불편함이었고 자연스럽지 않았다.

물론, 만약 내가 그녀와 사적으로 만나서 몰랐던 매력을 봤다면, 좋은 감정이 생겼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가정일 뿐 그런 가정에 속아 만나보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면 자신의 가슴에 응어리 하나 추가되는 바보 같은 짓 밖엔 안 된다.


자연스러웠다면 그걸로 된 거다. 내 인생에서 나다웠으니


사실 이 이야기가 나온 결정적인 이유는 사장님의 '어렸을 때 연애를 많이 해봐야 한다'는 조언 때문이었다.

나에겐 그리고 여러분들에겐 하고 싶은 '일'들이 한가득이다.


자연스러운 '사랑'조차 '일'로 만들지 말자.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것들은 '사랑'이 됐던 '일'이 됐던 화를 불러온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랑이 찾아올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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