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

1부 3화

by 수피

(본 내용은 소설입니다)


"또 동태눈깔하고 있네"

친근함이라는 가면을 쓴 지독하게 가시 돋친 말이 내 가슴을 찌른다.


"아.. 어"

하고 싶은 말은 항상 넘쳐나지만 이내 땅끝까지 삼켜버린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이니까.


엄마가 돌아가시고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남은 우리 세 가족 중에서 그나마 가장 감성과 이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누나가 가족회의를 갖자고 의견을 냈었다. 그 회의의 진짜 목적은 불 보듯 뻔했다.

엄마가 없는 앞으로의 생활을 화목하게 해 나아갈 방도를 찾는 것. 이건 마치 지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것과 같이 멍청한 짓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족애가 강한 누나를 위해서라도 그 회의에 진지하게 임해야 했다. 물론 누나 또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엄마를 위해서 더더욱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잔말 없이 나도 동의했고 그렇게 누나의 노력으로 성사된 가족회의는 그에 의해 철저히 무산되었다.


"아니 진짜 너무들 한다 너네들.. 다 내가 잘못한 거지? 어?"

맞다.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비꼬는 투로 말했을진 몰라도 너무 정확했다. 모두 그가 잘못한 것이다. 저 아니라고 말하는 투로 비꼬는 것을 보니 누나와 나는 가슴이 미어터질 듯했다.


결과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똑같다. 엄마가 살아있던 그때와 없는 지금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 정도로 지독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아빠가 짜증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이제 엄마도.."

회의가 무산되어감을 감지하고 미안함을 듬뿍 담은 표정으로 애써 달래는 누나를 보니 돌아가신 엄마가 똑같이 떠오른다. 무엇하나 바뀌지 못하고 바꿀 수 없음을 그때 직감했다.


"엄마, 엄마 그놈의 엄마. 이제 없는 사람 입에서 꺼내지도마. 아빠는 뭐 마음이 편한 줄 아니? "

이젠 엄마의 존재 자체를 지우려고 한다. 뻔뻔함을 넘어섰다. 죄책감이라고는 없는 걸까.

결국 회의의 식탁에는 화의 불씨만 타오른 채 끝나버렸다. 집이 고요해졌다.


고요함이 전과는 달랐다. 혼나거나 다투었을 때 생기는 집안의 고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이제 영영 말 한마디 안 할 수 있을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겹경사가 있듯 겹흉사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불안하다.

전후 과정 모두 배제하고 그 회의를 바라봤을 때 그에게 가혹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만큼 잘못된 행동들이 많았기 때문이지만.


하지만 어떤 말을 해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굳이 힘을 뺄 필요가 있을까. 괜히 잘못했다가는 내가 하고자 했던 일을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제 내가 생각해 온 일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목이 바짝 말라오고 침을 연달아 세, 네 번 삼켰다. 거울을 보고 입꼬리를 힘껏 올려본다. 어색하다.

이 정도로는 안된다. 가장 행복했던 때를 떠올린다.


한 달 전부터 내 정신상태가 약해졌기에 사람이 부정적이고 어두워 보이지만 꽤나 행복했던 때가 많았다. 수많은 정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나고 머리가 깨끗해진다. 나에게 없던 미소가 생겼던 걸까 아니면 원래 있던 미소를 이제야 되찾은 걸까. 기억은 시간을 역행하며 추억들을 하나하나 뒤집어 보는데 끝에 다다를 때쯤 불행이라는 곳에서 잘못 흘러온 추억 하나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 추억이 뒤집어지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 젊은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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