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3개를 샀다

#8. 장비와 폼 (브런치 오디세이)

by 수필버거

여행은 설렘이다. 떠나기 전 준비과정이 가장 즐겁고 들뜬다. 막상 가면 고생과 실망을 하게 될 확률도 있지만, 모여서 목적지를 정하고 경비를 갹출하고 마트에 몰려갈 때의 즐거운 설렘이 여행의 백미다.


글쓰기에 대한 로망이 여러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커피숍에서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는 내 모습을 그려보는 일이다. 계절에 따라서는 공원의 벤치에서 쓸 수도 있다. 마감에 쫓기면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꺼내서 글을 쓸 수도 있다.
노트북을 사야겠어. 운동도 장비와 폼이라잖아. 가볍고 폼나는 놈으로 구매를 해야겠다. 여행 전날 마트 가는 기분처럼 설렌다. 그렇게 해서 노트북만 3개를 사게 된다.

구매를 위해 인터넷 쇼핑에 들어가 살피기 시작했다. CPU, RAM, 메모리, 클럭...... 뭔 소리래니...
뭐가 좋은지, 뭐가 내 쓸모에 적합한지 잘 모르겠으니, 일단 무게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휴대성만 보자. 1kg 미만으로. 가벼울수록 비싸다.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대략 중간쯤인 15인치로 정하고 꽤 거금을 들여서 LG 그램을 샀다.
첫 그램 노트북으로 브런치에 많이 도전하고 많이 떨어지고, 때려치우고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한 후 축하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기뻤지만, 몇 개 쓰고는 손을 놨다. 바빠서 못썼다고 우겨보지만 허탈했나 보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용을 썼나 했을 거라 짐작한다.
그 해에 큰 아들이 공과대학에 입학을 했고, 공대 특성도 있고 요즘 대학생들은 노트북이 공책이라 해서 선물로 줬다.
나는 태블릿으로 쓰기로 하고.

어차피 자주 쓰지도 않는걸 뭐.

밖에선 태블릿으로 쓰고, 집에선 폰으로, 회사에선 데스크톱으로 썼다. 드문드문.
그 무렵 코로나가 터졌다. 막내가 고3에 올라간 해. 학교를 안 간다. 재수생 같은 고3 생활. 맨날 독서실 다니며 인강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태블릿은 막내 손에 넘어갔다.
사실 태블릿+블루투스 키보드 조합은 생각보다 불편했다.
두 개를 백팩에 넣고 다니면서, 그램 고마운 줄도 새삼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아무리 개점휴업 브런치 작가지만, 장비라도 갖춰놔야 마음이라도 편하지 싶어서 다시 노트북을 사기로 했다.
가만있자. 이번엔 용어 공부라도 좀 하고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네이버 들락거리며 수박 겉할기를 했다. 이제 조금 구분을 한다. 나의 쓰임에 맞춰서 사양을 내렸다. 모니터는 13인치로 하고, CPU도 한 단계 내렸다.
그래도 중고는 불안하니 규모가 좀 있는 스토어의 리퍼비시를 사기로 했다.
구입 가격이 1/3로 뚝 떨어졌고, 내 용도로 쓰기엔 차고도 넘친다.

막내가 수능을 치고, 원하던 대학에 합격을 했다. 태블릿을 내게 돌려주고 나의 두 번째 그램을 자주 쳐다보며 이것저것 묻는다.
이 녀석도 공대생이다. 나의 두 번째 그램은 이제 막내 방에 산다.

꽃피는 춘삼월에 브런치가 밀리의 서재와 손잡고 전자책 공모전을 한다는 알림이 왔다.
고민. 또 사야 하나.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다.
아는 게 힘이다. 이제 용어들은 많이 낯익다.
2개의 그램을 쓰면서 CPU와 RAM도 나의 용도엔 더 낮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무게도 1킬로 초반대면 메고 다닐만하고.

과감히 당근 마켓을 뒤졌다. 신중하게 며칠 동안 골라서 샀다.
27만 원. 1.34kg, 펜티엄 CPU, 4기가 램.
너무 사양을 내리진 않았을까? 미심쩍은 기분으로 노트북을 켰다.
메모리가 SSD면 부팅은 다 빠르다. (제법이다. 내가 이런 소릴 다 하고...)
글 쓰고 영화 보고 서핑하는 데는 전혀 모자람이 없다.


지금 쓰는 이 중고 노트북이 앞선 두 개의 그램보다 훨씬 손에 잘 붙는다.
이상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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