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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Sep 30. 2021

아내가 부럽다

쉰, 삶은 여전하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딱 떨어지지 않는 일은 혼자 한다. 어젯밤에도 그랬다. 몇 시까지 마칠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은 더뎌도 혼자 하는 게 편하다.

비 오는 습한 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매달 반복되지만.

'뭐하러 이런 사업을 벌였을까...' '체력이 필요한 제조업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부정적 감정이 요동친다.


납품차를 차례로 출발시키고, 말일에 꼭 보내야 하는 계산서 발행과 까칠한 협력업체 결제 몇 건을 하고 점심을 먹었다. 전체적인 마감은 새 달 첫날에 하면 된다.

비도 그치고 가을스러운 쾌청한 하늘. 느긋하고 편안하다. 거래처 전화 몇 통을 받았다. 내달 상황에 대한 의논도 있고 금월 납품 현황에 대한 불만도 있다. 웃으며 응대했다.

왜? 내가 기분이 좋으니까. 사람이 이리 간사하다. 감정은 더 간사하고.

어떤 감정이 시간이 흘러도 계속 그 감정인 경우는 많지 않다. 보람이 후회가 되기도 하고, 기쁨의 순간이 지옥의 문고리를 잡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며칠 전 햄버거 집. 나와 아내는 자리에 앉고 삼 형제가 키오스크에 주문을 입력하고 있었다.

"든든하다." 아이들의 건장한 뒷모습을 보며 아내가 한 말이다.

막내가 백일 무렵 어느 저녁이었을게다. 막내를 안고 소파에 앉아있던 아내가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 얘들 낳은 거다."라고 뜬금없말했었다.

그때 참 힘들었을 텐데. 조랑조랑한 아들 셋을 키우는 일은 정말로 해보지 않은 사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지쳐 보이지만 희미한 미소를 띤, 아련한 표정의 아내 얼굴. 생생하다.

햄버거를 먹으며 아직도 그러냐고 물었다. 그렇단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이냐는 표정이다.


누가 물으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절은 30대 10년이라고 답한다.

삼 형제가 차례로 태어나고 걷고 뛰고 웃고 울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시절.

내 아이의 다섯 살, 여섯 살은 내 인생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은 날, 골프도 끊고 산악회도 탈퇴했다.  

그리고 주말마다 동네 놀이터부터 스키장까지 아이들과 함께 뛰놀았다.

그때 사진을 보면 아련하고 뿌듯하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빠는, 거드는 사람이다. 내 몫의 즐거운 기억은 많지만.

제일 잘한 일이라는 아내의 고백에, 든든하다는 아내의 말에, 엄마의 깊고 그윽한 감정을 이해하는 일은 내 상상의 범위 밖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뿌리가 든든한 감정도 있구나.

오래도록 변치 않는, 변치 않을.

내 것도 이 정도인데. 아내의 그것은 얼마나 깊고 단단할까.

나는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 같다.

그런 감정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아내가, 엄마가 너무나도 부럽다.


(대문 사진 : 수필버거)


사진 이상희 작가

사진 이상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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