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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Nov 16. 2021

동굴 말고 터널

쉰, 삶은 여전하다

"형님. 요새 운동 안 하죠?"

후배의 느닷없는 질문에 당황했다.

"요새... 다 싫고, 다 귀찮다. 표 나나?"

답을 하며 되물었다.

"그냥, 그래 보여서요."

표가 나는구나. 하긴, 굳이 감추려는 노력조차 못하는 지경이니. 표 났겠지. 많이 났겠지.

겨울로 접어들어 옷이 두꺼워져서 몸이 흐트러진 건 표가 덜났을 텐데.

근래의 내 상태, 그러니까 말투나 쓰는 단어로 유추했거나 생기 없는 몸짓과 표정으로 느꼈으리라.


두어 달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예전에 우울증으로 시작해서 공황장애까지 가는 과정을 진하게 겪었기에 지금 상태가 그렇다고 자가 진단을 했다. 내가 물에 가라앉듯 죽겠으니 허우적거렸고, 나풀거리는 내 팔다리에 누군가는 타박상을 입었을게다.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내 혀에 베인 사람도 있을 테고. 내가 힘들다고 민폐를 끼치는 건 최악인데....


우울에서 탈출하려고 갖은 시도를 하고 있다. 정리가 첫 번째다. 우선 가벼워지면 좀 낫지 싶다. 먼저, 언젠가 쓰겠지, 갑자기 필요할 때 없으면 답답하겠지 하는 마음에 잔뜩 짊어지고 다니던 것들을 백팩에서 덜어냈다. 가방이 제법 가벼워졌다. 책상과 책꽂이에 한가득이던 서류와 책도 없애고 있다. 그래도 회사 서류니까 무조건 버릴 수는 없고 재분류를 해야 해서 짬짬이 한다고 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사무실은 점점 휑해지고 기분은 조금씩 가벼워진다. 가장 힘든 신변 정리도 조심스레 하고 있다. 내가 짐이 되는 관계를 줄이고, 내게 과분한 관계도 줄이려 애쓰고 있다.


후배의 말을 들은 다음 날부터 두어 달 쉬다시피 했던 운동을 강도 높여 재개했다. 뇌도 몸이고, 마음은 뇌에 있다고 하니, 몸을 격하게 움직여 보자 싶었다. 우울탈출의 두 번째 시도다. 습관적으로 등록만 해놓고 한참 가지 않던 헬스클럽에 다시 나간다. 며칠 기분 좋은 근육통을 느끼며 느슨해진 육체의 나사를 다시 조이고 있다. 타이트한 근육이 허리를 받치듯 마음도 지탱해 주면 좋겠다.


새벽에 30분 정도 책을 읽는 습관도 다시 들이는 중이다. 텅 빈 냉장고로 요리를 할 수는 없다. 채우자. 세 번째 탈출 시도. 몇 줄 읽고, 어슴푸레 밝아오는 창 밖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한다. 읽다 급히 메모를 하기도 하고. 별 거 아닌데, 뭔가 하고 있는 느낌이 좋다. 내가 속해 있는 독서 모임의 11월 도서(돈의 속성/김승호 저)인데도 너무 뻔해 보여서 밀쳐 놓고 있던 책을 꺼내서 읽고 있다. 뻔한 말은 너무 당연해서 잊고 살거나 무시하고 있는 말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삶의 기본기. 뻔하지만 지속적인 실천은 힘든 것들. 내 고민의 답이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 산책은 저강도 산행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다녀왔다. 오르막이 끝나는 코스의 갈림길에서 평소와 달리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다른 길을 걷고 싶었다. 지나치며 멀찍이 보던 작은 소나무 숲길. 역시 보는 것과 그 속으로 들어가는 건 확연히 다르다. 늘 가던 익숙한 길과 풍경에서 조금 비껴 나니 눈으로 새로운 자극이 들어온다. 품고 있던 생각과 고민의 타래가 살짝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 지나고 있는 길이 어두워도 동굴이 아니라 터널일 수 있겠다. 그래야 할 텐데.

이대로 터널의 끝에 닿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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