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마지막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납품 차를 오전에 1대, 오후에 1대 보냈다. 상차 작업을 하면서 세차게 쏟아지는 성가신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세 시 무렵 비가 그치고, 늦은 점심을 먹은 후 단골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짧게 잘랐다. 계산을 하고 믹스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시는데, 문득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 온 뒤의 상쾌하고 차가운 공기 때문이었을까.
미장원에서 수성못 호수공원까지는 편도 2km 남짓한 거리다. 미용실 앞 좁은 소방도로를 빠져나와 야트막한 야산을 감아도는 인도에 이르렀을 때가 다섯 시 즈음이었다. 겨울 해는 빨리 진다. 석양에 붉게 물든 회색 구름이 선명하고 예뻤다. 인도에 수북이 쌓인 젖은 낙엽 냄새는 달큼했다. 비가 먼지를 다 씻어가서 그럴 게다. 세상이 눈과 코로 가깝고 짙게 들어왔다.
몇 년 고생하며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 않으면 밥을 굶으니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우산 없이 세찬 비를 맞는 일 같다. 피할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몸을 재게 굴리며 살았어도, 그 기간 동안은 항상 쫓기고 쪼들렸다. 몇 년의 고생 끝에 겨우 궁핍한 지경은 벗어났을 때, 허리 펴고 먹는 한 끼의 밥과 제대로 안주를 갖추고 마시는 소주 한 잔의 맛은 도대체 무엇에 비교를 해야 할지 모를 만큼 강렬했다.
오래된 시장통의 돼지국밥과 깍두기의 맛을 내가 모르고 살았을까? 아니다. 정겹지만 흔한 그 맛을 모를 리가 있나. 억센 장마의 끝이 보인다고 느낄 즈음, 겨우 안도하며 먹은 국밥 한술과 한 잔 소주의 맛과 향은 짙고 선명했다.
해거름 녘 호수공원 산책길을 천천히 걸으며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이 선명하고 짙은 날이었는데 고마움의 대상은 흐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