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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Dec 13. 2021

감정 사용 설명서

쉰, 삶은 여전하다

심장의 고동소리가 내 귀를 울릴 정도로 강하다. 불규칙하고 강한 박동에 온몸이 쿵쿵 진동한다. 땀구멍이 콧구멍만 해졌는지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 채 5분도 되지 않아 겨울 코트까지 푹 젖는다. 결과로써 겪게 될 최악의 그림만이 머릿속을 채운다. 주차된 운전석에 아 있지만 손이 떨려서 핸들도 잡을 수가 없어 못 움직인다. 공황장애를 앓을 때 몇 번을 겪은 증상이다. 10분에서 20분가량 지속되다가 일순 사라진다.


죽도록 사랑하는 상대가 나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준다. 카페 창 밖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가 보인다. 몇 분 안에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와 환하게 웃으며 내 앞에 앉을 거다. 심장이 터질 듯 요동치고 극도의 긴장을 느낀다. 머릿속은 하얘져서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를 모른다.


양 극단의 감정 상태인데 몸의 반응은 닮았다. 증상을 촉발하는 호르몬은 다를지 모른다. 코티졸과 도파민 같은 다른 종류의 호르몬. 그래도 육체의 증상은 비슷하다.   


사춘기 때 친구들과 놀면 웃을 일이 많았다. 남고생도 굴러가는 낙엽에 까르르 웃는다. 너무 웃어서 날숨만 계속하면 호흡이 꼬인다. 들숨이 단박에 안되니 꺽꺽 소리를 낸다. 웃는 표정이 격해지면 울상이 된다. 미간도 좁아지고 입꼬리도 내려간다. 격하게 웃다가 복근이 당기고 승모근이 아프게 결리기도 한다. 종내에는 눈물도 난다.


서러운 통곡 끝에는 후련한 날숨, 그러니까 우리가 한숨이라 부르는 호흡을 하게 된다. 후련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나의 감정이 극단에 다다르면 근접하거나 반대되는 감정의 표현과 겹치는 경험을 한다.  


웃프다는 표현은 무엇과 무엇의 조어인지만 알려주면 누구나 알아듣는다. 아니까. 겪어봤으니까. 웃기고 슬픈 상황, 슬픈데 웃기는 상황은 누구나 몇 번은 만났으니까. 포개지는 감정은 많다. 황당과 당황이 그렇고, 사랑과 연민이 그럴 때도 있다. 섞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때는 사랑인 줄 알았어요.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어떤 감정을 해석하는 건 경험이 필요하다. 진폭이 큰 인생 경로를 통과한 사람, 조금 더 오래 산 사람이 해독력이 좋을 확률이 높다.


격렬한 감정 상태를 자주 길게 겪으며 감정은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했다. 뇌과학과 심리책을 읽어도 알긴 알겠으나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격랑에서 내리고 싶은데 감정의 처리가 되질 않으니 파도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멀미만 견디고 살았다.  


감정은 라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뇌가 지금의 상황을 기억으로 저장하기 위한 분류표 같은 것이 감정일 거라고 정리했다. 나의 정의(definition)다. 의미를 축소하고 기능을 강조하는 내 나름의 정리. 그제야 파도에서 내려서 살필 수가 있었다.


요즘은 무슨 감정이 스윽 고개를 들어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모든 감정에 다 그러지는 못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한다. 화를 덜 내는 사람이 됐다. 덜 놀랜다. 어떤 감정이라도 조금은 차분히 지켜보는 내가 편하다.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게 인생의 의미라면. 내 몸이 덜 상하는 좋은, 행복한, 기쁜 감정에 오래 머무는 것이 좋겠다.

마음의 곳간이 긍정의 감정으로 그득하면 인심도 좋아진다. 공감으로 주변을 품는 일이 많아지고, 여전히 실망하는 경우는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도 줄어든다. 나도 좋고 주변도 편하다.


행복하고 기쁠 일이 많은 길을 찾으며 산다.

그 길에서는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날 거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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