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눈물
큰 아이 입대 땐 둘째가 고등학생, 셋째는 중학생이었다. 저 먼 경기도 북부 백마부대로 입대하는 큰 애를 태우고 가서 입소식을 보고 다시 대구로 내려오면서도 아내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집에 아직도 손이 많이 가는 두 아이가 있어서였을까. 무덤덤한 큰 놈의 성격도 작용을 했으려나. 아무튼 큰 애가 영장을 받고, 입대를 하고, 택배로 옷이 왔을 때도 아내는 동요가 없었다. 혼자 울었을까? 높은 확률로 아니었을 거라고 본다.
엊그제, 그러니까 막내 입대 이틀 전에 차 옆자리에 타면서 아내가 눈물을 보였다. 안 보내고 싶다고 했다. 차에서 내릴 때까지 티슈를 쥔 손이 눈가로 분주히 오르내렸다.
어젯밤에도 울었다.
오늘 부대 근처에서 밥을 먹다가도, 사진을 찍다가도, 정문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눈물을 훔쳤다.
#딸 같은 아들
아들 셋이면 딸 역할을 하는 애가 하나는 꼭 있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크면 친구가 되는 딸 없이 셋째까지 아들이라고 서운해할 엄마를 위로하는 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막내가 딱 그랬다.
아기 때부터 엄마 품에 찰싹 붙어서 아내의 팔 인대가 늘어나 병원에 다닐 정도였는데, 커서도 엄마하고 죽이 제일 잘 맞는 아이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첫째와 둘째는 항상 없지만, 집돌이 막내는 늘 엄마하고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설거지도 하고, 같이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귀가가 자주 늦는 내가 덜 미안하게 해 준 아이다.
#가족
왕래하는 친척이 별로 없다. 아내는 나의 데면데면한 성격 탓이라고 진단한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와는 고등학생 때부터 하숙과 자취를 하며 떨어져서 살았다.
나는 입대를 혼자 했다. 당연하다고 여겼다. 아내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게 자랐다.
(그렇게 커서인가, 아직도 둘이 잘 논다.)
입대를 앞둔 막내는 물론 지 친구들하고의 술자리도 잦았지만, 큰 애와 둘째가 막내를 챙기는 모습을 자주 봤다. 세 아이 모두 한 동네에서 초, 중, 고를 쭉 다녀서 형제들의 친한 친구들도 서로 다 안다. 큰 놈의 친구도, 둘째의 절친도 막내 군대 간다고 밥과 술을 사주고 용돈을 주고 그랬다.
오늘 부대로 가는 차 안에서도 형과 형 친구들의 인사 전화를 받는 막내의 모습을 보며 흐뭇했다.
"저 놈, 그래도 형제 많아서 좋은 점도 있네." 공군 교육대에 입소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한 말이다. 아내는 "그러게." 하며 눈은 울고 입은 웃는다.
"고생했다." 달리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택배
곧 택배 박스가 올 것이다. 막내가 입고 갔던 옷과 소지품이 든 박스. 또 울텐데.
"아들 둘 더 있잖아." 어젯밤에 훌쩍이는 엄마를 보고 둘째가 한 말이다. 그 말이 그렇게나 든든하더라고 아내가 말했다. "짜슥, 다 컸네." 내가 거들었다.
'나도 있는데.' 이 말은 속으로 삼켰다. 택배가 오는 날은 내가 일찍 퇴근한 날이면 좋겠다.
#아빠
부대 정문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아내를 멀찍이 보며 흡연구역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눈 주위가 뻐근했다. 연기 탓은 아닐 텐데. 잠시 먼산을 바라보았다.
아빠는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