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승숙 작가 : 요컨대 첫 소설집을 묶고 난 이후에야, 분하지만 깨달았던 것이죠. 나는 오로지 나 자신에 대해 알기 위해, 무수한 ‘그’와 ‘그녀’들을 만들어낸 것일 뿐이구나, 하는 것을요. ‘그들’을 통해 나는 다만 나에 관해 알기를 기대했다는 것을요. 우습지 뭐예요, 거짓을 만들어내면서 진실을 알고자 했으니 말입니다.
< 불가능한 대화들: 젊은 작가 12인과 문학을 논하다 , 오늘의 문예비평 지음 > 중에서
글쓰기를 하면서 점차 깨닫고 있다. 쓰기는 나를 알기, 나를 알아가기라는 것을. 그렇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읽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쓰면서 확실히 느끼고 있다. 쓰기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읽기는 무엇일까. 100명이 100가지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있을 게다.
질문을 바꾸자.
나에게 읽기란, 내게 독서란 무엇이었을까.
#소설은 인간을 알게 한다
대학교 신입생일 때 뭔 바람이 불었는지 창작과 비평 전질을 샀다. 두꺼운 양장본으로 연도별로 한 권씩 스물댓 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휴교가 빈번했던 시절이라 학기 중에도 툭하면 휴교령이 내려지곤 했다. 여름 방학을 전후해서 읽기 시작해서 초겨울까지 읽었다. 첫 권 첫 장을 시작한 여름 두 달은 집에 틀어박혀서 먹고 싸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주구장창 읽어댔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책을 덮고 나오니 가을이었다. 그리고는 설렁설렁 초겨울까지 읽었다.
창비는 문예지이니 소설이 주로 실렸는데 단편이 많았지만 중편도 제법 있었다.어릴 때의 삼성당 문고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진입했다.
나는 그해 여름에서 겨울 초입까지의 시기를 통과하며 조금 성장했다고 믿는다. 갓 스물이 되어 어른의 세계에 겨우 턱걸이를 하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 소설은 인간을 알게 하는구나. 나를 포함한,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인간을.
섣부른 판단이었을까. 아닌 것 같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 걸 보니.
#역사는 무리로서의 인간을 알게 한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엔 역사에 빠져 살았다. 시작은 로마인 이야기였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와 책의 이념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겠다. 개인적 독서 경험에 관한 글이니까.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 권을 덮으며 유럽의 밑그림을 설핏 본 기분이 들었다. 미국의 롤모델도 알겠고팍스 아메리카나의 지향도 보였다.한동안 시오노 나나미의 모든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대망(야마오카 소하치 저)을 읽었고 소하치의 오다 노부나가까지 읽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시바 료타로의 (사카모토) 료마가 간다를 만났고 료마 이후가 궁금해서 메이지 유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찾아 읽었다. 일본이란 나라와 일본인 행동양식의 뿌리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삼국지 같은 중국 고전(역사서)도 다시 읽으며 몇 년을 역사에 빠져 살았다.
삼 심대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전쟁을 하나, 미사일을 쏘며 비행기를 타고 전쟁을 하나 인간의 욕구와 목적은 변하지 않는구나. 역사책은 인간이집단을 이룰 때의 욕망을 알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속한 사회의 뿌리를 보았다.
#자연이라는 차가운 진실.
사업을 하면 부침을 겪는다. 성하고 승할 때는 책을 읽을 여가가 없다. 어렵고 괴로울 때, 나는 책을 동굴 삼아 숨어들어 쉬는 경우가 많다.
처음엔 자기 계발서의 최면과 환상이 필요했다. 많은 자기 계발서가 이론적 근거로 차용하는 것이 양자역학이다. 궁금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가 출발점이었다. 리처드 파인만 교수의 말대로 지구 상에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충 뜻만 이해하는 정도였지만 물리학은 차가우나 경이로운 세상이었다.
나에겐 에브리씽 고나 비 올 롸잇! 파이팅! 같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립서비스보다 우주는 무심하다, 물리의 세상은 인간 따위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냉정한 진실이 오히려 위로가 됐다.
물리학의 두꺼운 양장본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덕분에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나 마블영화에 대한 이해도는 높다. 쓸데없는 일인지,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마흔 언저리의 나는 우주가 냉정하고 무심하다는 사실을 배웠고 그래서 오히려 편안했다. 인생은 원래 의미 없다는 말조차 위로로느껴졌으니.
#바닥을 치고 나서 쓰고 싶어 졌다.
쥐어짠 이유, 갖다 붙인 이유는 여러 개 있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이유라고 할만한 몇 개를 찾았다. 누가 왜 쓰냐고 물으면 폼나게 대답하려고. 그러나 사실은 왜 쓰고 싶어 졌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가 솔직한 답이다.
대단한 독서가도 아니었고 지금은 한 달에 한두 권 읽기도 벅차니 많이 읽어서 글이 흘러넘친다고 하지는 못한다.
심히 넓고 깊은 인생 경험으로부터 차오르는 깨달음을 써서 나누고 싶어서? 그것도 아니다. 사업 망한 경험은 부끄러운 일이지 자랑할 건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