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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Feb 13. 2022

화이트 아웃

도원 작가님의 글(https://brunch.co.kr/@juliesbook/107) 덕분에 책 '묘사의 힘'을 밀리의 서재에서 읽고 있습니다. 소설 쓰기 연습을 해보고 싶어서, 며칠 전 발행했던 글을 묘사에 중점을 두고 다시 써봤습니다. 에세이 버전은 아래에 링크를 겁니다. 혹시 비교해 보고 싶은 분이 계실까 해서요. 쓰고 보니 에세이로 쓴 글과 별 차이 없네요. 묘사, 이거 아주 어렵군요.


해발 1,600m에 위치해서 마일 하이 시티라고 불리는 도시. 도시 외곽으로 눈 덮인 록키 산맥이 닿을 듯 보이는 곳, 콜로라도 덴버.

쾌청한 날이었다. 이 도시에 올 때마다 두통이 생기는 건 고산병 때문이라고 해서 타이레놀을 먹어야 하는 것만 빼면 아주 마음에 드는 도시다. 겨울은 덜 춥고 여름은 덜 덥고 미국에서도 손꼽히게 햇빛 쨍한 날이 많은 지역이다. 

한인 식당에서 갈비구이 약간과 김치찌개를 점심으로 시켰다. 비싸면 맛이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잘 될지 긴장했던, 이 도시로 와야 했던 일이 잘 풀려서인가 뭐,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공깃밥을 두 개나 먹었다. 아내도 남이 해 준 밥이 역시 맛있다며 그릇을 싹싹 비웠다.


이번이 두 번째로 다녀가는 길인데, 덴버를 출발하여 일리노이로 가는 도로에 진입하여 달리기 시작하면 마치 상급자용 스키 슬로프 꼭대기에서 하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또 든다. 높이를 의식하는 듯. 곧 캔자스로 들어서면 지평선만 보일 테니까, 짬짬이 록키산맥의 능선을 눈에 담으며 운전을 했다. 카세트테이프를 꽂고 룰라의 노래를 틀었다. 겨울과 봄이 겹치는 계절의 맑은 하늘은 깨끗하고 차가운 유리처럼 쨍하다.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옆 좌석의 아내도 싱글거린다. 일리노이 서쪽 촌구석에서 덴버로 이사할 생각에 기분이 좋은가 보다.


캔자스주 경계를 넘고 해는 등 뒤로 기웃이 넘어가는데 하늘이 빠르게 회색으로 변한다. 록키산맥 동쪽의 대평원 지역은 기후 변화가 극심하다. 그저께 덴버로 가는 길에, 비록 멀리 서지만 순식간에 생겼다가 잠시 후 소멸하는 토네이도난생처음 봤다. 덴버를 출발할 때의 쾌청함이 기억에 남아서인지 날씨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제 한동안 평원의 직선도로를 지루하게 달려야 한다. 스쳐가는 풍의 변화도 없어지기 시작한다. 슬슬 아내와 운전 교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데, 눈이 실실 날리는가 싶더니 시시각각 눈발이 굵어진다. 곧 그칠 눈 같으니까 그때까지는 운전을 계속하겠다고 아내에게 얘기하고 눈 좀 붙이라고 했다. 곧 지옥을 경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4시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중국집에 갔다. 간짜장을 서너 젓가락 먹었을 때 전화가 왔다. 낯선 번호다. 받지 말까. 아, 진동이 아니구나. 벨소리가 민폐겠는데. 받았다. 자금 관련 소식이다. 일순 젓가락이 무겁게 느껴졌다. 꽤 공을 들였는데. 큰일 났구나. 머릿속으로 줄줄이 잡아 놓은 미팅들이 빠르게 명멸했다. 놓은 젓가락을 다시 들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산을 했다. 핸들을 잡은 손이 꼽꼽하다. '어쩌나' 보다 '어디로 가야 하나'를 생각했고 플랜 B가 있었던가를 생각했다. 


라디오를 틀었다. 주파수를 이리저리 돌려 로컬 방송을 찾았다. 블리자드. 블리자드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당황했었는지, 블리자드 뜻이 얼른 생각이 안 났고, 아, 그거는 순간 큰일 났다 싶었다. 졸고 있던 아내에게 아틀라스 지도책에서 가까운 시티나 타운을 찾으라고 말을 더듬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없는데. 이 정도 반경에 없으면 몇 시간 가야 있다." 둘이 미국을 종횡으로 돌아다니며 지도보기 도사가 된 아내가 말했다.


눈은 무서운 속도로 굵어지고 있었다. 거센 바람에 차가 좌우로 휘청거려 속도를 시속 30, 40km로 낮춰야 했다. 아까부터 윈도 브러시도 제 몫을 못하고 있었다. 눈은 앞 유리에 닿자마자 얼어붙어 브러시는 울퉁불퉁한 빙판을 달리듯 드르륵드르륵 소리를 내며 힘겹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눈이 급속하게 쌓이면서 차선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도로와 들판의 경계도 구분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앞은 그냥 하얀색뿐이다. 도로표지판은 눈보라 고드름 가로로 붙인 듯 글씨는커녕 사각 철판 모양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지경이었다. 퍼붓는 눈과 쌓인 눈에 반사되어 눈이 아려서 전조등을 끄고 미등에 의지해 운전을 했다.


화이트 아웃이라고 직감했다. 사방이 아니, 천지가 온통 하얗다. 어디서부터 내 몸이 시작되는지 조차 알 수 없다는 느낌, 나조차 하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향감각을 잃었다. 차가 앞으로 가고 있기나 한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연료 게이지를 봤다. 절반 아래를 가리킨다. 기름을 아껴야 산다. 히터를 껐다. 직선도로라 믿으며 직진만 했다. 여차하면 도로를 벗어나 들판으로 나뒹굴지도 모른다. 입에선 김이 나오는데, 손과 등에선 진땀이 배어 나왔다. 아내는 우짜노를 연발하며 훌쩍인다. 차를 세우고 히터만 켰다 껐다 하면서 아침까지 버틸 수 있을까. 불안이 엄습한다.


차를 몰아 동네 커피숍으로 갔다. 머릿속이 하얗다. 짧은 운전 중에도 프로젝트가 몇 달 밀리는 정도로 수습이 되면 선방이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끝이 보인다고 짐작하는 코로나를 생각했다.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그림을 그리고 옳다구나 했는데, 이젠 어그러지는 그림떠오르면서 옅게 식은땀이 났다. 그래도 여파를 헤아려야 플랜 B를 만들 수 있다고 기우뚱하는 마음의 덜미를 움켜잡았다.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서 정신이 조금 들었다. 일단 마음을 잠시라도 저 멀리 보내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브런치 앱을 열었다. 나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어떤 작가는 여전히 행복했고, 누구는 여전히 열심이었고, 또 어떤 이는 여전히 치유를 하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하다는 사실이 조금 위로가 됐다. 뮌헨의 마리 작가님의 글(https://brunch.co.kr/@mariandbook/1186) '눈보라 속으로'가 오래전에 겪은 블리자드의 기억을 불러냈다.

'그래, 나 아직 살아있잖아.'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도리질을 해도 차가 들판에 처박히는 상상은 자꾸 달라붙었다. 무서웠다. 겁에 질린 아내를 위해서라도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온통 하얀색이던 차 앞 쪽에 뭔가 까만 점 같은 게 보였다. 헤드라이트를 켰다. 야광이다. 점이 앞쪽으로 이어진다. 차선규제봉 끄트머리가 눈 위로 점점이 솟아 있었다. 저게 왜 여기 있지 따위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 살았구나 소리가 저절로 나왔고 아내에게 우리 이제 살았다고 소리쳤다. 근데 저게 어디까지 이어져 있으려나. 그래도 들판에 박힌 차 안에서 동사한 시체로 발견될 확률은 낮아졌구나.

빼꼼한 규제봉 대가리에 박을 듯 달라붙어서 운전을 했다. 얼마나 갔을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하얀색은 시간 감각도 삼켜버린 걸까. 한참을 달렸다고 생각했을 때, 두운 하얀색을 뚫고 저 멀리 빨간이 깜빡거린다고 느꼈다. 화이트 아웃 상태에선 환시, 착시가 생긴다. 확인이 필요했다. 아내에게도 보이냐고 물었다. 보인다고 했다. 휴우, 헛것을 본 건 아니구나.

경광등이었다. 경찰차. 우리는 블리자드 안에 갇혀 좌표를 잃었었다. 표지판도 무용지물이니 지금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도 몰랐고, 마을 근처를 지나고 있다 해도 알 방법이 없었다.

경찰 손전등으로 유도하는 대로 조심스레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찰 차를 세우라고 손짓을 하고 창 쪽으로 다가와서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이젠 안심하라고 따뜻하게 말했다. 아내와 나는 땡큐를 만 번 외쳤다.


브런치를 읽고선 글이 쓰고 싶어졌다. 닥친 상황에 도움이 되는가는 뒷전이다. 잠시 딴짓을 하며 잊고 싶었을까. 블리자드의 기억을 쓰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인데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강렬한 기억이긴 하지. 글을 쓰면서 엉클어진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 따박따박 계획대로 진행된 일이 오히려 적었지 않나? 죽으란 법은 없지란 생각들이 하얘진 머릿속에서 두더지 머리 튀어나오듯 한다.

새하얀 지옥 같은 그때의 그 눈폭풍 속에서 만났던, 희망의 규제봉 머리 같기도 하다.     


정전이라고 했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자가 발전기가 있는 학교 같은 공공건물엔 불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촛불 켜진 동네 어귀의 맥도널드엔 사람들이 수런수런 하고 있었다. ATM도 카드 단말기도 안되지만, 우선 요기를 하라고 간단한 먹을거리를 줬다. 우리는 허겁지겁 먹었고 공립학교 강당에서 잘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자정 지나 새벽이었다.

아내와 나는, 살았다.

그 길 위에서 죽지 않았다.


이 글을 다 쓰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다. 평정심만 회복해도 좋겠다. 항상 거기서부터 시작이니까. 당황하지 않는 것. 계획이 조금 틀어졌다고 죽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 이게 플랜 B다.


배가 고프다. 이제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겠다.


에세이 형식으로 쓴 글 https://brunch.co.kr/@supilburger/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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