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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Feb 09. 2022

블리자드

오랜 전 일이다.

콜로라도 덴버에서 일리노이 서쪽 머콤까지 차를 운전해서 가는 길이었다. 초 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고 출발한 게 화근이었다.

일리노이까지 가는 길은 중부 캔자스와 미주리를 관통한다. 아내와 둘이 운전을 교대로 해서 이틀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미국 중부는 평원지대다. 평야에 난 고속도로는 커브길도 잘 없을 만큼 직선으로 지평선까지 뻗어있다. 덴버로 올 땐 먼발치에서 토네이도도 봤다. 들판은 광활했고 풍광은 지루했다.


해거름 무렵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캔자스 어디쯤이었다. 오다 말겠거니 싶었는데 해가 떨어지고 기온이 낮아지면서 눈은 점점 굵어졌고 세찬 바람까지 불었다. 눈이 쌓이니 겁도 나고 도로도 잘 보이지 않아서 이대로 계속 갈 수 있을까 염려다. 라디오를 켜고 로컬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니 블리자드란다. 어, 큰일 났다고 아내에게 말하고 (아틀라스) 지도책에 가까운 마을이나 도시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했다. 아내는 반경 몇 시간 거리 내에는 도시가 안 보인다.


오늘 오후.

늦은 점심을 먹다가 자금 관련 소식을 들었다. 기대한 내용은 아니었고, 계획이 틀어졌구나 했다.

가락을 놨다. 일순 음식이 모래같이 느껴져서.

잠시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난감하다. 플랜 B가 있었던가?


어, 어 하는 사이에 차선이 안보이기 시작하더니 곧 도로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길과 들판의 경계도 사라졌다. 고속도로 안내판엔 바람에 날린 눈이 고드름처럼 가로로 얼어붙어 글자도 안보였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헤드라이트 불빛이 쌓인 눈에 반사되어 눈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사방에 하얀만 보이고, 온천지가 백야처럼 희뿌연 했다. 헤드라이트를 끌 수는 없어 안개등으로 한단 내렸다. 쏟아지는 눈에 윈도 와이퍼도 느려지며 얼어고 있었다.

블리자드가 무서운 건 화이트 아웃 때문이라더니, 방향감각이 없어졌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보여서 내가 지금 앞으로 가는지 뒤로 가는지 도로 위를 달리고나 있는지 도무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차가 도로를 벗어나 들판에 나뒹구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고속도로 중앙선이 있음 직한 자리에 차선규제봉 머리 부분이 보일락 말락 했다. 다시 헤드라이트를 켜니 차선 봉의 머리 부분이 하얀 눈밭에 점을 찍은 듯 직선으로 쭉 이어져 보였다. 들판에 처박히지는 않겠구나.

기름이 얼마나 남았는지 획인 해야 했다. 계기판을 살폈다. 이대로 정처 없이 가면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까. 차를 세우고 히터를 틀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이 기름으로 아침까지 견딜 수 있을까. 연료 게이지의 바늘은 중간과 쿼터 지점 사이에 있었다. 더 갈 수는 있겠지만, 중앙선 차선봉 머리가 계속 보인다는 보장이 없다.

도로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아내는 어떻하노 를 연발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안심시켜야 했다. 나도 무서웠지만 '죽기야 하겠나, 이런 눈폭풍은 오래 안 간다, 곧 그치거나 약해질 거야, 가다 보면 지도에 안 나오는 작은 마을이라도 있겠지'라고 주문을  중얼거리며 중앙선 봉에 박을 듯 달라붙어 거북이 운행을 했다.   


점심으로 시킨 짜장면을 반 이상 남기고 차를 몰아 동네 커피숍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희뿌옇다. 짧은 운전을 하면서 계획이 무산되진 않겠지만 몇 달 밀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여파를 가늠해야 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브런치를 켰다. 글 몇 개를 읽고서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뮌헨의 마리 작가님(https://brunch.co.kr/@mariandbook)의 글, 눈보라 이야(https://brunch.co.kr/@mariandbook/1186)가 죽을 뻔했던 블리자드의 억을 소환했다.

나, 아직까지 살아있잖아.


얼마나 달렸을까, 고개를 쳐드는 온갖 나쁜 상상에 시달리며 핸들을 잡고 있었다. 기름을 조금이나마 아끼려는 마음에 히터는 끈 지 오래인데 손과 등에는 땀이 배였고 아내는 이제 훌쩍이고 있었다.

화이트 아웃 상태에서는 환시도 생긴다더니, 저 멀리 빨간색 불빛이 명멸하는 게 보인다고 느꼈다. 아내에게도 보이냐고 물었다. 빨간 불빛 같다고 했다. 경찰차였다. 내 진행방향으로 차를 돌려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찰은 차 밖에서 손전등을 흔들고 있었다. 경찰이 유도하는 대로 우회전을 하니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정전으로 컴컴했지만, 자가 발전기가 있는 건물은 드문드문 밝았고 맥도널드엔 촛불이 켜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 살았다.


브런치를 읽다가 글이 쓰고 싶어졌다. 닥친 상황에 도움이 되는가는 뒷전이다. 잠시 딴짓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블리자드 이야기를 쓰면서도 엉클어진 계획을 생각한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 계획대로 따박따박 진행된 경우가 오히려 적었지 않나?, 뭔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라는 생각들의 꼭지가 하예진 머릿속에 점점이 솟는다. 착 달라붙어서 천천히 따라가 볼까.


경찰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이젠 안심하라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눈폭풍에 마을 전체가 정전이 돼서 ATM으로 돈을 찾을 수 없고 카드 단말기도 작동을 안 해서 결제가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무 걱정 말고 맥도널드에서 요기를 하라고 했고 잠은 학교 강당을 개방하니 거기서 자라고 했다.

우리허겁지겁 햄버거를 먹고는 옷을 꽁꽁 껴입고 죽은 듯이 잤다.

나는, 우리는, 길 위에서 얼어 죽지 않고 살았다.


이 글을 다 쓰면 기분이 조금 나아질 것 같다. 평정심을 회복하지 싶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길은 항상 있다. 차분히 찾으면 된다.

중요한 건, 계획이 몇 달 미뤄진다고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이게 플랜 B다.     

빨리 집에 가서 밥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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