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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버거 May 11. 2022

돌아가고, 태어나고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저 물레에도 운명의 실이'

이어령 선생의 저서 중 내가 읽은 첫 책이다. 10대 때였고 이미 출간된 지 한참 지난 책이었다. 제목에 끌었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지성 만난 것 같았던 어렴풋한 느낌은 남아있다.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제법 열심히 읽고 공감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88 올림픽 개막식. 한낮의 찬란한 태양과 정적 속에서 스타디움 잔디 가로지르던 굴렁쇠 소년의 절제된 여백의 이미지가 강렬했다.


봄날, 그의 마지막 책을 읽었다.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 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보이차를 따르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러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이어령 > 중에서


어떤 페이지엔 와인을 또 다른 페이지엔 보이차를 아낌없이 따라 주고 다시 빈 컵이 된 이어령 선생은 돌아가고, 그의 마인드를 충실히 받아 담은 김지수 기자의 손에서 책이 태어났다.  


그의 빈자리는, 누군가가 금방 채울 수 없어 오래 여백으로 남을 것 같다.

책을 덮으며 품위, 끝, 시작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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