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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by 수필버거

가끔 늙은 내가 나오는 꿈을 꾼다. 꾸깃꾸깃 구겨진 울상이었다가 겁에 질린 허연 낯빛이거나 후회 가득한 벌건 얼굴을 하고 쫓기는 꿈이다. 놀라 눈을 뜨면 어김없이 새벽 3시 무렵이다. 세월이 귀신의 얼굴을 하고서 귀신같이 쫓아온다.


더 바랄 게 없다는 또래 사람을 어쩌다 한 번씩 본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게 살았다고 말하는 표정 없는 얼굴도 본다. 이대로 무탈하기만 바란다는 사람은 조금 간절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뭘 저지르고 잘못되면 큰일 아니냐는, 맞장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듣는다. 입 닫고 고개만 끄덕인다. 동의는 아니다.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해봤자 소용없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옳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틀린 것도 아니다.


뒤척인 밤 뒤에 맞는 아침은 무겁다. 한 팔 짚고 상체만 세운채 잠시 앉았다가 끙하고 일어나 커튼을 젖힌다. 창밖은 벌써 밝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입에 물고 세면대 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는다. 양치를 하며 왼손으로 머리를 뒤적여 네댓 가닥의 새치를 살펴본다. 수염과 구레나룻에는 흰 털이 제법 보이지만 머리카락은 아직 검다. 꿈에 나왔던 늙은 나에 비하면, 아직은 '젊은' 얼굴이다.


나는 아직도 내가 해내길 바라는 게 많다. 아직 이만하면 되었다는 마음에 기대고 싶지도 않다. 움직이는 자에게 무탈(無頉)은 불가(不可)하다. 시도와 '저지래'는 동전의 양면이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옷을 챙겨 입고서 거울을 한 번 더 본다.

나는 아직 낮 꿈을 좇을 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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