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귀한 줄 모르고 살았다.
건방지게도.
아차 하는 새, 겨울이 닥쳤다.
그제야, 애쓰지 않아도 사람이 들끓던 그 시절이 생의 봄이며 여름이었음을 깨달았다. 벚꽃이 진 후 휑한 가지를 올려보며 어제 꽃길이 화려했음을 문득 실감하듯, 내 깨달음은 항상 늦다. 북풍 몰아치는 눈 덮인 벌판에서 하루를 연명할 밥 한 끼를 구하려 맨발로 헤매면서 예감했다. 영원할 것 같던 그 따뜻하고 뜨거운 계절은 이제 내 생에서 다시 못 볼 것을.
코로나 2년과 포스트 코로나 1년 동안 상전벽해처럼 변하는 세상을 목격했다. 분리되고, 갇히고, 막힌 시간 동안, 바뀐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궁리와 미래의 내가 행복할 길을 고민했다. 그 결과이자 새로운 시작이 2023년 봄에 만든 '대책회의'다. 시작은 미약했다. 억지로 초대한 사람들은 내 꿈에 귀 기울이기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썰렁한 온라인 공간에 더 빠른 반응을 보였다. 함께 고민을 나누며 미래를 만들어 갈 사람을 만나는 건 불가능한 일 같았다. 초조보다 또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은 기분에 자주 힘이 빠졌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성원(成員) 여부와 상관없이 북클럽은 한 달에 한 번씩 또박또박 열었다. 신나지 않아도, 언제든 때가 되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까지 버리진 못했다.
맥연회수(驀然回首)란 한시(漢詩) 구절을 좋아한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백 번 천 번 찾아 헤매던 그녀가, '문득 머리 돌려 보니 (맥연회수)' 희미한 등불 아래 서있더라"는 뜻이다. 그해 가을 대책회의가 그랬다. 그리도 애타게 찾던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인재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나 둘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댓글 릴레이가 반짝이는 별처럼 늘어서고, 토론은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다채로워지고 있었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고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항상 늦된다. 나는.
그 가을부터 대책회의에 화색이 돌았다. 힘차게 맥이 뛰고 혈색이 좋아지고 활력이 감돌았다. 바깥은 가을이지만, 우리는 봄이었다.
'대책회의'란 모임명은 가지고 놀기 좋은 이름이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그 가을부터 참 다양한 시도를 했다. '아무튼, 술 (김혼비 저)'로 술책회의를, 가벼운 트레킹을 떠나는 산책회의를. 원작 있는 영화로 무책회의(movie+대책회의)를, 아무도 신청하지 않을 것 같은 벽돌책으로 별책회의를 열었다. 회원이 오십 명, 백 명으로 불어가며 한 달에 한 번 열던 대책회의 북클럽도 두 개, 세 개로 늘어갔다. 독서 모임의 숫자가 는다는 건 구성원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독서 모임이 풍성해지는 시기였다. 만물이 짙푸른 여름 같은 나날들. 계절은 달력 따라 따박따박 변해도, 내 마음은 성하(盛夏)의 계절에 머물렀다.
작년 봄이었다, 글이 너무 좋아 오래 구독한 브런치스토리의 여름 작가 (https://brunch.co.kr/@wji1780)가 책을 낸다는 글을 만났다. 댓글을 주고받다가 대구 올 일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온 팬심. 실례를 무릅써야 했다. 이왕 오시는 걸음, 혹여 짬 나시면 차 한 잔 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동대구역 근처 스타벅스에서 만나게 된다. 얘기를 하다 보니 나보다 두어 살 적지만,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었다. 글로만 소통하다가 처음 만나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은 기우였다. 오랫동안 서로의 글을 읽어온 사람 간의 얼음은 깨기도 하기 전에 알아서 녹아 버렸고 그 후 두 번 더 이어진 만남에서도 대화의 즐거움만 컸다. 그리고 그녀의 출간 기념회에 가고, 정식으로 작가 초대를 한 건 작년 여름이었다. 난생처음 해보는 북토크라 부러 시간을 넉넉히 잡아 12월에 대구에 와주십사 부탁을 했다.
최종적으로 오십 명이 넘는 회원이 모였다. 난생처음 하는 북토크 진행. 원고를 준비하고 연습도 했건만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어버버버 하다가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격려와 칭찬의 말도 들었지만, 조는 사람도 있었다는 후문도 들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대책회의로 인해 오십 대 나이에도 처음 해보는 일이 많이 남아있겠다는 예감이, 그로 인해 가슴 설레는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 주는 기쁨은 상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어진 뒤풀이 겸 송년회는 왁자지껄, 북적북적 한바탕 잔치였고 대책회의 여름의 절정이었다. 대책 여름의 피크를 만들어준 여름 작가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전한다. (필명이 운명이었을까요)
그 후에도 금년 1월부터 2월까지 진행한 글쓰기 모임인 '브런치회의'에는 18명의 회원이 참여해서 열두 명의 브런치 작가가 탄생했다. 읽으면 써야 한다는 나의 명제를 증명해서 기뻤고, 브런치 글벗이 생겨서 든든했다.
2월의 대책회의 2주기는 또 한 번의 흥이 터지는 잔치였다. 그때 느꼈다. 지금이 다시 움직여야 할 시점이라는 걸.
연탄가스처럼 질 나쁜 소문이 내 귀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늘 염려하는, 어느 모임에나 생기기 마련인 본능향(本能向)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풍문이었다. 게다가, 기운이 뻗치던 대들보 회원들이 조금씩 지쳐가는 게 보이기도 했다. 관계의 깊이를 추구하는 소수 인원의 모임은 다르겠지만, 대책회의처럼 성장을 지향하는 모임은 꼭 유념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이 지속적으로 유입 돼야 하는 것이 그 첫 째요, 재밌고 흥미로운 이벤트가 계속 이어져야 하는 것이 두 번째다. 변변찮은 내 경험에서 유추한 이 두 가지 조건은,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모임의 성장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두 가지 가능성이 공존한다. 어색함 대 즐거움. 최근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새로운 만남이 주는 즐거움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오래된 연인과의 데이트를 택하지만, 실제 경험을 측정하면 낯선 이성과 식사한 후의 즐거움이 더 크다(Dunn, Biesanz, Human, & Finn, 2007). 그러니 내향적인 사람들이여, 어색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람도 만나 볼 필요가 있다.
-<행복의 기원>, 서은국 -
23년 봄 대책회의 오픈.
그해 가을부터 올봄까지 일 년 넘는 기간 동안의 즐겁고 뿌듯한 시간.
160명을 넘어선 회원 수.
즐거움과 성장을 한껏 맛본 시간, 다시는 못 볼 것 같았던 나의 봄과 여름은 좋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가능했다. 사람이 봄이고, 사람이 힘이다. 불변의 진리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금년 2월을 기점으로 대책의 전성기가 너무 일찍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일찍 핀 꽃은 일찍 시든다. 단정하긴 이르지만, 좋지 못한 징후도 진도 1의 아주 약한 지진처럼 느껴졌다.
한 걸음 더 내디뎌야 할 타이밍.
새로운 일이 새로운 신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관점을 바꾸면 다시 한번 선순환의 루프를 만들 적기(適期)이기도 하니까.
오래 준비해 왔던 다음 카드를 꺼낼 때라고 판단했다.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