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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짓도 자산이다

by 수필버거

고통이 커질수록 희망은 비대해진다. 고통이 고난의 지경이 되면 희망은 주술이 된다. 코로나로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의 심정이 그랬다. 코로나만 끝나면 화려했다고 기억되는 이전 시절로 마법처럼 순간이동할 거라고 믿었다. 그래야 공평하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듯이.

22년 가을이 되자 코로나가 끝난 분위기였다. 더는 견딜 수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해 겨울 초입부터 회사 매출이 급등했다. 마술 같은 일이 진짜로 일어난 것이다. 길고 긴 터널 끝에서 만난 찬란한 보상 같은 나날. 그래서 불안했다. 사람은 상황이 너무 좋아도 현실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아니나 다를까, 빛은 강렬하고 짧았다. 이듬해 봄까지 이어지던 상승 곡선은 거짓말처럼 수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몇 달 만에. 그제야 신중에 신중을 기하던 정부는 마침내 코로나 종식 선언을 했다. 2023년 5월이었다. 뒷북 같았다. 마법은 없었다.


봄부터 꺾인 매출은 끝없이 떨어졌다. '이럴 줄 알았다'는 생각과 '그래도 혹시'란 마음이 부딪혔다. 고기 기름기 제거하듯 바람이나 소망을 걷어내고 현실적으로 판단하면 단기 호황은 단지 재고의 밀어내기, 상품의 위치 이동일 뿐이었다. 원청업체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단숨에 코로나 전으로 돌아갈 거란 기대에 발주를 급격히 늘렸고, 일선 유통업체도 같은 생각으로 주문장을 날렸다. 우리 회사에서 생산한 제품이 원청 물류 창고로, 다시 전국 각지의 일선 소매점 진열대로 이동하는 데 걸린 시간이 짧은 호황기와 맞아떨어졌다. 소비자가 오지 않고 사지 않으니 퇴근길 차 막히듯 상품의 정체(停滯)가 빚어진 것. 앞서 '코로나라는 가속 페달' 글에 쓴 대로 소비자가, 사람들이, 사회가 변했다는 내 분석이 맞았다. 이런 건 좀 틀렸으면 좋으련만, 왜 나쁜 예감은 틀리질 않는가. 한번 바뀐 소비 방식이 돌아오는 일은 없다. 알면서도, 실낱 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버티기에 들어갔다.


23년 가을에야 가망 없겠다는 판단을 굳혔다. 코로나 전과 후는 산업혁명기와 정보화 사회처럼 전혀 다른 시대가 돼버렸다. 며칠 고민 끝에 십수 년 전에 접었던 내 브랜드를 다시 살리기로 했다. 궁여지책이었다. 시월쯤 친한 도매상 사장과 저녁을 먹으며 의견을 구했다. 돕겠다는 답을 들었다. 예전 매출대장 파일을 찾아내 지역별, 점별 분석을 했다. 대형 소매점만 상대하면 될 것 같았다. 남은 중소형 문구점도 별로 없다. 비록 꺾였지만 OEM 이란 매출 베이스가 있으니, 이익률 차이까지 더하면 PB 판매가 어느 정도만 올라와 줘도 될 것 같았다.

문제는 PB 유통을 하기엔 OEM용으로 생산, 납품하는 품목만으로는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오를 대로 올라버린 원자재값, 물류비용과 유류대를 고려하면 단품 일종(一種)에 가까운 구성으로 전국 유통은 무리다. 배보다 배꼽이 클 확률이 높다.


창고를 구석구석 뒤졌다. 앵글 선반 저 위와 저 뒤에 처박혀 있던 먼지 쌓인 박스도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끄집어 내렸다. 다양한 재고가 쏟아졌다. 노트만 해도 싸바리 링제본, 실제본, 떡제본, 무선 제본 등 대한민국 모든 방식으로 만든 노트들이 있었다. 비건 레더 메신저 백, 파우치, 클러치도 한가득. 캐릭터 상품도 상당한 양이 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매출 늘려 보겠다고 무시로 만들고 팔지 못한 재고들. 돈으로 계산하면 다 얼마야, 얼굴에 열이 나고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또르륵 흘러내렸다.

이 수많은 뻘짓들. 내가 한심한 바보 같이 느껴졌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공장 바닥 여기저기 흩어놓은 박스를 덮고 있는 먼지를 한숨으로 날리려는 듯 길게 숨을 뱉었다. 팔짱을 낀 채 턱을 당기고 치켜뜬 눈으로 박스 더미를 한참 노려보다가 믹스 커피 한 잔 타서 공장 뒤뜰로 나갔다. 담배 한 모금 깊이 빨고 고개 들어 먼 하늘에 눈을 두고 연기를 흘리는데, 다른 각도로 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번뜩 들었다. 당장 손해 날 게 없다. 오래된 뻘짓이니 회계 처리까지 다 끝났지 않았나.


달리 보면, 나는 시행착오 없이 다종다양한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휴대폰을 열어 제본, 싸바리, 가죽, 부속, 지퍼, 봉제 같은 단어를 입력했다.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번호들이 주르륵 불려 올라왔다. 한 명, 한 명 이름을 보니 당시의 상황과 스토리가 하나씩 깨어났다. 수업료 톡톡히 낸 이 많은 뻘짓들이 달리 보였다.


상품 기획만 제대로면 제작은 문제없다.

경험으로 안다. 경로를 알면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얼마나 절약되는지를.


그렇다.

뻘짓도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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