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색
브런치라는 플랫폼을 만난 덕에 시작한 글쓰기는 몇 달간의 작가 코스프레 시기를 만들었다. 에세이로 할 수 있는 여러 시도를 했다. 영화 후기, 책 리뷰, 수필, 일기에 가까운 기록 같은 글들. 브런치라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것 같았다. 남들이 입고 다니는 옷이 너무 예뻐 보여 여러 브랜드의 매장을 들락거리며 진열대의 옷을 꺼내 입어보던 시기. 화려하고 세련돼 보이던 옷은 내가 걸치기만 하면 빌려 입은 태가 났다. 필연 같았던 브런치와의 조우는 점점 우연의 혐의가 짙어졌다. 오르막 길을 달리던 자동차의 엑셀에서 발을 뗀 것처럼 글 쓰는 속도가 확 줄었다. 뭔 미련인지 차에서 내리지는 않았다. 목적지도 없이, 그렇다고 기분 전환이라도 되는 드라이브도 아닌 채 느린 속도로 차를 몰고 기름만 축내며 동네를 배회하고 있었다.
읽다 익다 책방의 온라인 글쓰기에 가입한 건, 긴 시간 떠나지 않는 글쓰기에 대한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던 차에 만난 우연을 덥석 낚아챈 것이었다. 세 줄에서 열 줄의 짧은 글을 쓰는 날이 많았지만 2천 자가 넘는 글을 쓴 날도 간혹 있었다. 슬슬 달궈졌다. 재미도 붙었다. 그때 장강명의 글쓰기 에세이 '책 한 권 써봅시다'를 만나게 됐고 명령 같은 문장에 꽂히게 된다. 작가 말고 저자가 돼 보란 말. 한 가지 주제로 원고지 600매를 쓰면 얇은 책 한 권 분량이라며, 이왕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한 번은 그렇게 써보라는 부추김. 홀라당 넘어간 건 아니었다. 계산을 해보니 초짜가 덤비기엔 엄청난 분량이었다. 하고 싶은데 하기 싫은, 해야겠는데 피하고 싶은 양가적 마음을 며칠이나 품고 지냈다.
석 달간 읽다 익다의 글쓰기 클래스에서 글을 쓰면서 깨달은 건 있다. 나는 반드시 글을 써야 할 사람은 아닐지라도 쓰고 싶은 사람인 건 확실했다. 오래 쓰고 싶었다. 오래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내 마음을 확인했다. 오래 쓰려면 수련이 필요하다. 그래, 해보자. 까짓 거.
삼 개월 계획으로 원고지 육백 장 쓰기에 덤비기로 했다. 근데, 뭘 쓰지?
고수리 작가 : 유년의 기억, 사무친 순간, 꿈의 기록, 살아 있는 말. 네 가지는 제가 그동안 글을 써오면서 필요했던 글감이에요.
- < 글쓰기의 쓸모, 손현 지음 > 중에서
주제 생각하는데 한참 걸렸다. 공감하는 고수리 작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고 작가의 이 말은 여러 글에서 인용했다. 내가 밑천이 짧다.)
마이너스 셈법으로 접근했다.
유년의 기억. 써야지. 언젠가는. 쓰고 싶다. 그러나 에세이 보다 소설로 쓰는 게 좋겠다. 나를 다 드러낼 자신이 없다. 숨을 공간이 필요하므로 소설 글감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기약은 없다.
사무친 순간. 내 삶, 내 몸, 내 마음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고달픈 시기가 있었다. 좋은 글은 재미가 있거나, 감동이 있거나, 교훈(혹은 정보)이 있어야 된다 했다. 내가 사무친다고 남들도 그리 읽어줄 것인가. 재미와 감동 요소는 별로 없다. 그렇다면 교훈이나 정보라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숙성이 필요해 보인다. 지금 쓸 일이 아니다. 아직은 쓸 자신이 없다. 또 뺀다.
꿈의 기록도 빼기로 한다. 마음에 품고 있는 일을 시작하기 전이어서 꿈의 기록이 아니라 버킷리스트 나열이 될 공산이 컸다.
하나 남았다. 살아 있는 말. 현재에 기대는 글이라고 해석했다. ing의 글.
브이로그를 떠올렸다. 지금 내 상황을 중계하듯 쓰면 어떨까. 글쓰기 초보자, 오십 대 아저씨, 작은 책 한 권 쓰기의 무모한 도전. 전전긍긍 쓸 게 틀림없다. 출간의 가치는 없어 보이지만, 글 쓰는 사람들이 모인 브런치에 연재할 만은 하다고 생각했다. 공감해주지 않을까.
목차는 많은 글쓰기 책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항목을 따르기로 했다. 문장에 관한 팁, 당장 쓰기 시작하라는 말, 자주 써야 는다는 충고, 고쳐쓰기가 글쓰기의 백미라는 것까지, 가지고 있던 글쓰기 관련 책들의 목차를 옮겨 쓰고 겹치는 것들을 추렸다.
석 달은 과대망상이었고 오산이었다. 2022년 3월에 첫 글을 쓰고 10월 마지막 날 37번째 글을 발행하면서 원고지 604장을 메웠고, 약 칠 개월이 걸린 나만의 소장정(小長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해 브런치 북 출간 프로젝트에 응모하고 떨어졌다.
응모 버튼을 누른 날 저녁, 혼자 자축의 생맥주를 마셨다. 두세 잔까지는 기쁘고 뿌듯한 기분을 안주 삼았다. 단맛이 날 때까지 꼭꼭 오래 씹었다. 입 닫고 혼자 마시는 술은 빨리 취한다. 당분간 읽지 않기로 작정했던 두 권짜리 내 브런치 북의 글을 손 가는 대로 터치하고 읽었다. 은근한 취기 탓이다. 글이 뒤로 갈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였다. 물론 내 눈에만 그렇겠지만.
손익계산을 했다. 짧은 암산으로도 남는 장사란 답이 나왔다.
남긴 이문(利文)은 다음 글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