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한다

익숙함

by 수필버거

요즘은 '셀럽'으로 불리는 유명인사 그리고 연예인과 술 마실 일이 더러 있었다. 키는 나만한데 몸무게가 내 반의 반도 안 나갈 것 같던 여자 배우, 회당 출연료 더 받는 꼼수 썰로 배꼽 잡게 하던 사극 전문 중년 배우, 서민 드라마에 뺀질뺀질한 제비로 자주 나왔던 얼굴에 기름이 자르르했던 탤런트, 청춘스타 발굴에 일가견이 있다고 알려졌던 느끼한 디자이너 아저씨. 깨춤 추듯 까불고 살던 어린 시절이라 내 딴에는 기고만장했지만, 한동안은 셀럽들 앞에서 야코가 좀 죽었었다. 표 내지 않기 위해 허리를 곧추 세우고 목소리 깔며 인사하고 술잔 채우고 부딪히고 그랬다. 그들은 주빈 대접이 당연하다는 듯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고, 그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 나는 끽소리 낼 타이밍을 자주 놓쳤다.


글 쓸 충분한 시간을 낼 수 있는 날을 미리 잡아야 했다. 글 한 편에 드는 시간이 들쑥날쑥하기도 했고, 어떤 글은 며칠씩 걸리기도 해서였다. 택일을 하면 창 넓고 시야 탁 트인 커피숍을 골라 가서 잘 쓴 에세이 한 권 꺼내 몇 페이지라도 읽고서야 내 글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놓고도 겨우 첫 문장 한 줄 쓰고 멍하니 앉아 있기 일쑤였다. 죄 없는 노트북을 뒤통수 때리듯 퍽 접고 백팩 주섬주섬 챙겨 그냥 나오는 날도 많았다.


내게 글쓰기는 '의식(儀式)'같았다. 정해진 순서대로 루틴을 하나씩 공들여 밟아야 겨우 글 하나 받아낼 수 있는. 간혹 브런치에서 퇴근길 지하철에서 폰으로 대강 쓰고 올린다거나, 침대에 엎드려 태블릿으로 급하게 써서 발행했다는 글을 보면 맥이 빠졌다. 내게는 거창한 행사 같은데,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툭툭 해내는 놀이처럼 보였다.


어울려 보니, 그들도 마시면 취했고, 취하면 헛소리를 했고, 더 취하면 뻘짓도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나랑 별반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들. 외려 얼굴이 알려져 불편이 많은 사람들. 마냥 신나고 재밌지만은 않은 삶. 그 불편을 유명세로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무거운 스트레스를 견디는 안쓰러운 생활인일 뿐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한때 브런치에서 이런 작가 명함도 줬더랬다. 위 사진은 읽다 익다 책방의 온라인 글쓰기를 시작한 21년 12월 무렵에 받은 것이다.

3년에 발행 글 50개면 한 달에 두 편도 안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작가 선정되고 몇 달 열심인 시기가 있던 걸 감안하면 정체기가 길다 못해 손 놓고 브런치를 방치했다는 뜻이다. 구독자가 40명인 것도 용한 일이었다. 온라인 글쓰기 삼 개월과 원고지 600매 쓰기 칠 개월이 지났을 때 구독자는 세 자리 숫자가 돼 있었고 글은 100개에 육박했거나 갓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예인, 셀럽들이 그냥 나와 같은 인간임을 새삼 깨닫는데 시간이 걸렸듯이, 글쓰기가 어려운 집안 어른 또는 실수하면 혼낼 것 같은 선생님 위치에서 아무 때나 쓰레빠 끌고 포장마차 가서 쏘주 한잔 하자고 할 수 있는 옆집 형님 자리로 내려오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약 10개월. 거의 1년.


글쓰기가 쉬워졌다는 뜻은 아니다. '네놈의 정체를 알았다' 정도가 맞는 표현이겠다. 여전히 첫 문장은 낑낑거려야 겨우 쓸 수 있고, 쓰다 보면 산으로 가는 게 일상이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고 나만 겪는 유난한 일도 아님을 알았다. 글쓰기란 놈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을 열 달을 끙끙 쓰고서야 깨달았다. 게다가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고 쓰나, 공장 뒤뜰에서 담배 물고 폰으로 끼적거리나, 첫 글이 쓰레기인 건 똑같았다. 고쳐 쓰면 나아지는 건 진리이니 글쓰기의 시작, 그러니까 언제 어디서 쓰느냐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도 깨쳤다.


페이스북에는 긴 글이 많이 올라온다. 인스타에도 몇 단락 짜리 글이 올라오기도 하고, 엑스의 짧은 글은 원래 긴 글보다 더 쓰기 어렵다. 유튜버도 직접 원고 쓰고 영상 만들어 올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 책 읽는 점점 인구가 줄어드는 세상이라지만, 글쓰기 능력은 갈수록 중요해지는 느낌이다. 대책회의 (네이버) 밴드 모임의 운영자로서 글을 써서 포스팅할 일이 많다. 브런치에 '나는 대책이 있다' 매거진 연재도 하고 있고, 대책회의 프로그램이 배출한 브런치 작가들과 함께 만드는 공동 매거진에도 글을 쓰고 있다. 글 쓸 일이 점점 늘어난다.


나는 여전히 글을 잘 쓰지는 못한다. 그래도 비문 남발 지경은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어떤 주제라도 험하지 않게, 그럭저럭 봐줄 정도는 쓴다고 자평한다. 내 얇은 재능과 내가 들인 공(功)의 양으로는 지금 이 정도가 최선 아닐까 싶다.

내 글쓰기의 시작을 고려하면 '지금 이 정도, 이게 어디야'란 마음도 든다.


이런 생각이 들 때면 셀프 토닥의 마음이 된다.

2년 전에 독서 모임 대책회의를 만들길 참 잘했다는 마음과 함께,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결심한 그 순간의 내가 참 장하다.


오랜만에 남는 장사 했다.

칭찬한다,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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