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 (志向)
슬그머니 시작했다.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진 않더라도, 비장한(?) 포고문 한 개 정도는 브런치에 올렸음직 한데, 없다. 일의 완성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중도에 포기하고 흐지부지 될 때를 대비해서 샌드박스에 그림 그리듯 슬며시 개시하고 아니다 싶으면 얼른 모래통을 흔들어 버릴 요량이었을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침 뚝 떼려고, 어떤 꿈도 꾸지 않았던 척 새까맣게 잊은 듯 덮고 남은 날을 살아가기 위해.
마음이 딸깍.
신호가 왔다.
지금이다.
미루는 마음과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마음이 같은 크기로 동존(同存)하고 있었다. 새 달력을 걸며 이제는 글을 시작할 때라는 초록 불을 보았다. 어제 쓰던 글 이어 쓰듯 살며시 '나는 대책이 있다' 매거진을 만들고 첫 글을 썼다. 1월 7일이다. 모두 으랏차 하는 새해 분위기도 연재 시작에 힘을 보탰을 게다. 이제 11개 썼다.
오래 가슴에 담고 있던 씨앗 하나가 스스로 움트고 싹이 나더니 내 몸 밖으로 조금씩 밀쳐 나와 어느새 어린 나무로 자랐다. 아름드리 거목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과 거름 주고 물주는 그 과정을 쓰고 있다. 아직은 되돌아보며 쓰는 글이다.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하면서 예까지 왔는가를 쓰고 있다. 현재의 이벤트와 마주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다음부터는 현실에 보조를 맞추며 반박자 정도 늦게 글을 쓸 예정이니, 천천히 오래 쓰는 매거진이 될 것이다.
독서 모임 '대책회의'의 시작과 목적지까지의 여정을 글로 남기기로 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둘 중 큰 건 감성의 영역이다. 기억이 생생할 때 기록으로 남기고 파서다. 가고자 하는 곳에 비록 닿지 못하더라도 희망과 불안 사이를 오가며 두근두근 애쓴 이 시기를 기억하고 싶다. 내일보다 조금 젊은 오늘의 나를, 용을 쓰고 기를 쓰는 지금의 내 모습을 훗날 무릎 담요 덮고 소파에 앉아 읽고 싶다. 흐뭇할지 회한에 잠길지는 모르겠다. 울든 웃든, 이래도 저래도 내 인생 아니겠나.
작은 이유는 이성의 영역, 즉 홍보다. 회원을 늘리려는 의도, 오프라인 아지트를 열었을 때 한 명이라도 더 와줬으면 하는 바람, 출간 프로젝트 응모.
어떤 주제로던, 그리 못나지 않게 적당히는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自信)이 생겨서 가능한 시도다. 대책회의 브런치 작가들끼리 쓰는 공동 매거진과 '나는 대책이 있다'만 해도 나로선 벅차다. 언감생심 당선은 생각지도 않지만, 다 하는데 나만 안 하면 서운할까 봐 하는 브런치북 출간 프로젝트 응모도 있으니, 이 정도만 해도 올 한 해 글쓰기 목표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까지는.
구독하는 레마누 작가 (https://brunch.co.kr/@lemanu76)는 요즘 글을 엄청 자주, 많이 쓰고 있다. 대량 생산인데 품질도 균일하다. 글쓰기는 공장 생산이 아니라 순수 수작업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다. 처음 그의 글을 만났을 때 소설을 쓰고 있었다. 괜찮았다. 구독을 누르고 지금껏 읽으며 알게 된 그녀의 꿈은 어릴 때부터 중년이 된 지금까지 초지일관 소설가란다. 그 치열한 노력에 감탄하고 그 꾸준함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게 된다. 며칠 전 다시 소설 쓰기에 도전하다는 작가의 글에 댓글을 남겼다. 레마누 작가님의 절절한 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고. 나도 어릴 때 잠깐 소설가를 꿈꿨다는 말과 아직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것 같다는 말도 썼다. 한참 후 답 댓글 알림이 떴다.
"함께 쓰시죠."
마음이 어수선한 아침이었다. 산길을 걸었다. 부러 발을 재게 놀렸다. 무엇을 잊으려 머리를 흔들듯이. 1킬로쯤 걸었을 때, 내게 몰입의 순간은 글을 쓰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게 그나마 자부(自負)를 주는 순간도 글쓰기에 있었다.
마음을 어지럽히던 일들과 하등 상관 없어 보이는 생각이 마치 정답처럼 떠올랐다. 그리고는 마음의 회색 구름이 천천히 걷히는 기분을 느꼈다.
내려오는 길에 레쓰비 한 캔 사마시며 브런치 앱을 열었다. 단편 한 번 써보겠다고 만들고는 달랑 글 3개 쓰고 팽개쳐둔 '소설 같은 일' 매거진을 찾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폰 화면에 담배 가루 두 개가 붙어 있었다. 입으로 훅 훅 불어서 털어내고 티셔츠 자락으로 반들반들하게 닦았다.
어떤 이의,
어떤 꿈은,
전염성이 강하다.
* 제목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밴드의 노래에서 빌려왔습니다.
https://youtu.be/RPNXngFSU1k?si=CKV5dUuWZ6KSAyi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