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보다

2. 관찰과 묘사

by 수필버거

작년 여름에 차를 바꿨다. 늙은 놈을 사서 오래 탔다. 아스팔트가 진흙 같던 뜨거운 날, 길 위에서 죽었다.

그 봄, 큰 아이 첫차 사러 반야월 중고차 단지에 같이 갔었다. 아들이 계약서 쓰고 보험 드는 중에 중고차 업체 사장이 낡은 내차를 보고 한 대 더 팔 욕심이 생겼는지 이것도 한번 보실래요 했다. 타고 간 차는 그랜드 카니발이었고 보여준 차는 올뉴카니발이었다. 약간 어두운 주차장 구석에 짙은 회색 차가 반짝이고 있었다. 모델명에서 느껴지는 대로 차모양이 일변(一變)하는 시기에 나온 차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카니발이란 차명만 같지 완전 다른 차였다. 값도 적당했다. 가을쯤 바꿀 생각이었는데 한 계절만에 차가 죽었고 현기증이 돌만큼 뜨거운 땡볕을 맞으며 차를 샀다.


바꾼 차 운전석에서 본 도로는 온통 올뉴카니발이었다. 과장 보태 한 대 건너 한 대 꼴이다. 이차가 베셀이었나, 생각이 들 만큼 흔했다.

하루 몇 시간은 운전을 한다. 출장이라도 가면 온종일 하기도 한다. 그래도 몰랐다. 의식하지 못했다. 올뉴가 이만큼 많은지. 도로를 보며 운전을 해도 까맣거나 희거나 회색 차만 보였지, 특정 브랜드의 차가 눈에 든 적은 별로 없다. 람보르기니나 테슬라 사이버 트럭 정도면 모를까. 선택적 주의 (Selective Attention)다.


기억을 생각했다. 사람 눈을 통해 하루동안 입력되는 정보량은 엄청나다. 데이터로 치면 10기가가 넘는다고 한다. 그중에서 인식하는 정보의 비중은 아주 많이 낮고, 기억으로 저장되는 정보는 또 그보다 아주 아주 많이 적다고 한다. 우리는 대체 뭘 보고 사는 걸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사는 걸까.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다 / 김영하 저-


브런치에 글 쓴 날은 세밀하게 기억한다. 글 제목만 봐도 글 쓴 그날이 사진처럼 기억난다. 글로 쓰고 싶은 마음이 드는 시간과 사건은 글도 자세하다. 없는 솜씨에 들은 건 있어서 나름 묘사란 걸 시도했다는 뜻이다. 큰 애 차를 산 날도 글을 썼다. 내 딴에 기분이나 느낌, 상황을 상세히 쓴다고 썼을 것이다. 내 차를 바꾼 날은 쓰지 않았다. 차를 산 건 같지만, 애정의 대상인 아들이 그 장면에 있고 없고의 차이 때문이다.


무리 중에 관심이 가는 이성이 있으면 눈이 먼저 간다. 눈길이 오래 머물고, 자세히 살피려 자주 눈이 간다. 사소한 행동 하나에서 의미를 찾고 느낌으로 지문을 붙인다. 무수한 흑백의 사람들 가운데 그이만 칼라로 보인다. 시간과 공기가 멈춘 것 같다. 나중에 친구에게 설명을 하면 어떻게 하게 될까. 살빛이 연한 초콜릿 색으로 건강해 보인다던지, 목소리가 봄볕처럼 따뜻하다던지, 오래되고 뒤틀린 나무 미닫이문 사이로 찬 공기가 술술 들어오는 시장통 선술집이 개츠비의 저택으로 느껴졌다던지, 앞뒤 순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새진 목소리로 빠른 속도로 떠들 것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보다 / 김영하 저-


본다.

생각한다.

쓴다.


오래 본다.

오래 생각한다.

오래 쓴다.


'본다'는 사랑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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