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 (文體 / Style)
내 문체가 읽는 이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자기 얼굴은 잘 알지만 그래도 거울은 보는, 그 마음으로 제미나이와 챗GPT에게 내 글 분석을 시켰다. 위 표는 제미나이 분석이다. 내가 아는 내 얼굴이다. 남(?)들도 그렇게 보는구나, 싶다. ai는 대량의 문서 평균값을 찾는 기계니까.
문체란 무엇일까. 아는 것 같은데 직유와 은유로 귀에 쏙 박히게 한 마디로 표현하긴 어렵다. 네이버 사전은 세 가지 출처를 보여준다. 나름 균형이며 방패다. 나는 고려대 한국어 대사전 정의 중 1번이 좋다. 문학적, 학문적 해석보다 글쓴이의 개성이나 특징이라는 사람 위주의 설명이 마음에 든다.
나는 왜 건조하고 냉랭한 문체를 쓰는가. 성격이겠지 싶어 MBTI로 치환해 봤다. 양자택일 선택뿐이다.
외향 보단 내향, 감각보단 직관, 감정 보단 사고, 인식 보단 판단. 나는 INTJ라고 진단한다. 한참 전에 네이버에서 10분짜리 MBTI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다. 결과는 ENTJ였다. E가 좀 미심쩍었지만 나머지는 얼추 맞다고 동의했다. 내심, 외내향 분석이 양극단만은 아닐 테니, 테스트 결과 50.1대 49.9의 외향이면 그냥 E로 분류하는구나, 하고 말았다.
인간은 생각의 총합이다. 생각이 입을 통해 나오면 말이 되고, 말이 손을 통해 종이에 놓이면 글이 된다. ai의 내 문체 분석엔 대체로 동의한다. 건조, 간결, 압축, 사실적인 문체가 나라는 인간이 지향하는 바이며,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이라면, 앞으로도 대단한 성취와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 되지 않고선 내 글이 널리 사랑받을 확률은 낮다. 요즘 인기 있는, 어쩌면 항상 인기 있는 글은 다정하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위로와 공감의 글이다. 값싼지 값비싼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글쎄, 에세이와 소설에 미련을 버리고 기사나 르포 같은 장르로 전향하면 되려나. 전향하고 싶다고 받아 주겠나. 나는, 함량 미달이고 자격 미달이다. 그리고 그리 쉽게 버려질 거면 미련이 미련이지도 않을 게다.
문체를 바꿔볼까. 내 딴의 노력이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의 파편들을 혀로 튕겨 공기를 흔들어 소리로 바꾸면 '말'이 된다. 공기의 떨림도 잠시, 허공을 부유하던 말은 곧 흩어지고 애써 밀어냈던 생각의 조각들은 어디에 닿기나 하고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그 덧없음을 견딜 수 없어 땅바닥에 나뒹구는 내 말을 주워 후후 불어 흙을 털고, 무거운 침묵을 견디며 투박한 손가락을 놀려 창백한 모니터 화면 위에 앉히고 나는 그것을 글이라 부른다. 말과 글은 내 생각의 똥이다. 누구는 냄새나고 더럽다고 피할 테고 누구에게는 거름이 될지도 모르지만.
저마다 무엇과 무엇을 견디며 근근이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마침내 널리 사랑받는 글이란 대개 상처 입은 영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솜사탕 같은 위로이거나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는 공감의 온기를 입은 것이다. 나의 메마르고 성마른 문장이 포근하게 서로를 안아주는 잔치에 초대받을 확률이란 아득히 낮아 보인다. 문득, 에세이라는 장르에 품었던 짝사랑 같은 미련이나 소설이라는 형식을 향한 지독한 갈망을 이제는 그만 까만 가슴 밑바닥에 묻어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차라리 내 문체가 박수받을 장르로 망명이라도 떠나야 하는 것인지, 짙은 안갯속을 헤매는 배처럼 갈 길 잃은 마음이 자꾸만 진창 같은 상념의 늪으로 빠져든다.
품이 많이 든다. 게을러서 저리 쓰지 못했나, 잠시 의심도 한다. 글 쓰며 더 애쓰면 바뀔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가끔은 저 문체가 좋기도, 필요하기도 할 게다. 그건 그리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 때가 왔을 때, 그때의 일이다. 지금은 참고 용을 써야 겨우 저런 글을 쓸 수 있는 처지다.
기자불립(企者不立)이라 했다. 까치발로는 오래 서있을 수 없다.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 (Le style est l'homme même.)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Georges-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 / 박물지(Histoire Naturelle) 저자)
생긴 대로, 나대로, 나스럽게, 쓰며 살랜다.
얼마간 일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