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호랑이다.

보고 읽고 생각한다. #파이 이야기

by 수필버거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영화는 보지 못했다.


소설 끄트머리에 리처드 파커는 파이 자신이었음을 알려준다.

파이가 증언하는 두 가지 버전의 표류기 중에서 리처드 파커가 나오는 것이 나도 좋다.

그 버전으로 소설을 이해해봤다.


배가 침몰하고 작은 구조선에 겨우 살아남은 파이에게는 두 가지 절망이 남았다.

큰 확률의 죽음과 더 큰 확률의 죽음.

앞의 죽음은 대부분의 조난자들이 맞게 될 죽음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죽는 것.

구조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들어설 여지는 있지만.

뒤의 죽음은 당면한 죽음이다. 리처드 파커(뱅골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죽음.

살아남을 확률이 매우 작아 보인다.

확률적으로(물론 당사자의 희망이 섞인 해석이지만) 더 큰 두려움은 작은 것을 잊게 하고 지금에 집중하게 한다.


소설은 뱅골 호랑이 한 마리와 16세 소년 파이가 작은 구조선에 타고 7개월간 태평양을 표류한 이야기다.

리처드 파커는 무엇의 은유일까?

나는 파커를 '감정'으로 해석했다. 공포와 희망이라는 감정.


무엇이던 먹을거리가 생기면 가장 먼저 리처드 파커부터 먹인다. 그래야 파이가 얼마간 더 살 수 있다.

또 허기가 돌아오겠지만, 호랑이의 배가 부른 동안은 살 수 있다.

파이는 리처드 파커가 배부른 시간만큼의 희망을 번다.


파커가 다시 배가 고파 보이고, 먹일 것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은 절망스럽다.

언제 굶주린 뱅골 호랑이의 앞 발에 맞아 죽거나 강한 턱에 물려서 찢겨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눈 앞의 죽음의 공포만큼 절망스러운 게 또 있을까.

허기진 리처드 파커는 파이의 공포다.


공포와 희망 사이의 팽팽한 긴장이 망망대해 위의 파이를 살아있게 했으리라.


읽다가, 또 가끔 책 끝을 접다가 궁금증이 생겼다.

독자를 둘로 나눠보자. 살면서 어려운 터널을 통과해 본 독자들과 이제 막 둥지에서 나와서 아직은 고난을 겪어보지 못한 독자들로.

삶의 바닥과 어둠을 통과한 사람들은 내가 해석한 리처드 파커를 이해하리라 믿는다.

세상이 아직 밝게만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리처드 파커가 무엇으로 읽힐까?

많이 궁금하다.


나는 리처드 파커에게 한 가지를 더 투사하며 읽었다.

후회.

공포와 희망은 사람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후회는 사람을 가라앉게 만든다. 내가 겪은 바로는 그렇다.

무거운 쇳덩이가 발목에 매달린 채로 태평양에 던져진 것처럼 끊임없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다.

잠시의 쉼도 허용하지 않는다.

익사하지 않으려면 뭐라도 줘야 한다.

헛된 희망과 거짓 위로라도 던져줘야 한다. 싸구려 자기 연민이라도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산다.

나에게 리처드 파커는 공포와 희망 그리고 후회였다.


삶에서 겪는 많은 고통은 감정의 얼굴로 나타난다.

생의 어두운 부분을 통과할 때, 밤새워 일을 하거나 굶주리는 일 따위는 어찌어찌 견딜만한 경우가 많다.

정말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은 항상 감정이다.

불안, 공포, 절망, 고립감...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긴 시간을 견디며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감정을 전지적 시점으로 볼 때가 온다.

이때가 내가 지나는 어둠이 동굴에서 터널로 바뀌는 순간이다.


감정을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관리한 파이는 영리했다.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힘의 많은 부분은 감정에서 온다.

그런 '감정'관리의 열쇠는 언제나 객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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