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게 아등바등
알리바이만 남기려는 의도였다.
맛있는 거 사줄라 했는데 너거가 없었잖아. 뭐 요런 그림.
"저녁에 우리하고 밥 먹을 사람 있나?"
크리스마스이브 오후에 가족 단톡 방에 내가 남긴 메시지다.
여기서 우리는 나와 아내다.
기대는 당연히 없었고, 높은 확률로 우리 둘만 먹을 거니 비싼 횟집이라도 갈 심산이었다.
5인 이상 모임 금지에 9시까지만 술집이 문을 열지만, 놀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한 청춘에겐 장애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떻게라도 돌파구를 찾았겠지 싶었다.
"저는 약속 있어요."
큰 애 톡이다. 그럼 그렇지.
근데 이 아가씨는 누굴까?
가만있자... 난 아들뿐일 텐데...?
프로필 사진을 확대했다.
지난봄에 큰 놈이 술 한 잔 하자했을 때 내게 보여준, 클럽에서 만났다던 그 얼굴이 아닌데?
남중, 남고, 공대, 군대, 그리고 다시 공대인데도 재주는 있구먼. 드문드문 연애도 하고, 내게 자랑질도 하고.
요새 집에 들어오면 지 방에 쿡 틀어박혀서 통화만 주야장천 해대더만, 다 이유가 있었군.
학교에, 알바에 바쁠 텐데, 그래도 할 건 다하네.
장하다~~~
"저는 지금 나가요~~."
막내 톡이다.
어라. 얘는 프로필 사진이 없어졌네?
막내의 여자 친구는 나도 안다. 꽤 오래 만나고 있고, 나도 몇 번 봤으니.
프로필에 떡하니 올려뒀었는데.... 왜 없어졌을까나.... 헤어졌나? 그런 내색은 없던데...
에고.. 모르겠다. 심각하면 뭔 얘기라도 했겠지.
"뭐 드실 건데요?"
둘째 놈이다.
역시... 짜쓱이 간 보는구먼. 좋은 거 먹으면 같이 먹겠다, 뭐 이런 뜻 이리라.
얘 프로필은 몇 달 전부터 새로운 여자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래도 귀퉁이에 마스크 낀 지 얼굴이 있다.
얘는 뭐... 워낙 자주 바뀌니...
아들내미들의 연애사를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안 궁금하니 안 묻는다.
알아서들 하겠지. 지 인생 지 껀데.
아이들이 먼저 말을 꺼내면 들어주긴 한다.
물론 내게는 다 해본 듯한, 다 아는듯한 뻔한 얘기들이지만.
지 놈들은 얼마나 진지한지. 좋을 때다.
"별것 없다. 다시 네 고향에 가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친구들하고 맛있는 것 먹고, 아름다운 여인하고 사랑을 나눠라."
자다가 불로초를 뱀에게 도둑맞은 길가메시에게 우트나피쉬팀(대홍수에서 살아남아 불로불사가 된 현인)이 해 준 말이란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수메르 문명에서 나온 서사시이니, 수 천 년 전의 말이다.
오래 살아남은 '말'은 공감이 힘이 세다.
사람의 일생을 저보다 더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연애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도 열심히 먹고 마시고 놀아라.
그렇게 살면서 기쁘고, 슬프고, 아프고, 후회하고, 으쌰 으쌰 하기도 하는 너 자신을 열심히 겪고 관찰하렴.
'너'를 깊이 알고 나서야 '남'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
그렇게 사는 모습이 효도 아닐까.
김승호 작가의 말처럼 너희를 키우며 이미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웠다. 효도는 벌써 다 했다.
이브고 나발이고, 너무 추워서 횟집은 패스 했다.
입 하나 늘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치킨과 케이크 그리고 캔맥주를 사서 마루에서 셋이서 함께 먹었다.
둘째는 추운 날에 심부름은 좀 했지만, 표정을 보니 뭐 그리 억울해 보이진 않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