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시간의 속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 SF #1. 사랑의 블랙홀

by 수필버거

"지난주에 뭐 하셨나요?"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이것과 저것을 했습니다."라고 선뜻 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말꼬리를 흐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는 우리에겐 어제나 그제나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요.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정도를 속도에 빗댄 표현이 있습니다.

세월이 10대에게는 시속 10km, 50대에는 시속 50km로 흐른다는 메타포가 그것입니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표현이지요. 과학자들은 이를 기억으로 설명합니다.

매일이 새로움의 연속인 어린 시절에는 뇌가 받아들이고 기억할 것들 투성입니다.

개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촘촘하게 기억을 새길 수밖에요.

나이가 들면 놀라움이나 새로움은 줄어들고 익숙함은 점점 늘어납니다.

기억할 것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뇌는 몇 시간, 며칠 또는 몇 년까지도 뭉뚱그려 저장을 해도 사는 데 하등 지장이 없지요.

분 단위로 기억을 새기던 어린 날의 하루는 중년의 몇 달, 몇 년과 맞먹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늙을수록 '시간 순삭'이 되는 거지요.


오늘 하루를 반복해서 살 수 있다면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인생이 길어지니 축복?

늘어난 인생이 축복이 되려면 무엇으로 하루를 채워야 할까요?

오히려 저주가 된다면 왜 그럴까요?


대부분의 '스토리'는 이런 상상이나 질문으로 시작하고 생깁니다.

작가 혹은 감독이 생각하는 답을 소설과 영화로 설득력 있게 보여주면 좋은 스토리지요.



지금부터 영화를 살펴봅니다.

원제는 Groundhog day, 한국 제목은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요약하자면, 이기적인 찌질이의 행복과 사랑 찾기랄까요.


장르는 SF.

우주선도, 로봇도, 슈퍼히어로도 안 나옵니다만 그래도 SF.

서브 장르는 "타임루프"물입니다.

원인 모르게 특정 시간대에 갇히고, 탈출하기 전까지 무한 반복되는 설정이 타임루프입니다.

내일이 없는 반복 지옥이지요.

"오늘도 어제와 같음을 예감하며 출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비장하다."

(김 훈 작가의 수필집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머, 기억이 정확한지 자신은 없습니다)

사실 많은 `우리`들은 이렇게 반복되는 하루를 살지요.

지옥까지는 아니지만 너무 지루해서 매일 생각만으로라도 탈출을 꿈꾸며 위안을 얻습니다.

아무튼 현실에서 일어나기 불가능한 일을 영화의 설정으로 사용하니 SF가 맞습니다.


보통 이런 설정에선 주인공이 어려운 무엇인가를 해 내거나 바꾸면 루프에서 빠져나갑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막던지, 역사를 바꾸던지 하는 `미션`을 클리어해야만 반복이 종료됩니다.

이 영화에선 주인공의 성장과 사랑이 그 '무엇'입니다.

여기서 이 영화는 여타 타임루프 물과 약간 차별화가 됩니다.

격렬한 사건이나 파국 또는 죽음을 영웅적으로 막거나 바꾸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사건에 치중하는 일반적인 타임루프 물과는 달리 필(주인공/빌 머레이 분)의 내면의 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나'를 바꾸는 일은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건 우리 모두 너무 잘 알지요.


사람이 불치병처럼 도저히 내가 어쩔 수 없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겪는 심리적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1) 부정 (이건 사실이 아닐 거야!)

(2) 분노 (왜 내게 이런 일이!)

(3) 협상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4) 우울 또는 절망 (아니야... 나는 틀렸어..)

(5) 수용

영화는 이 5단계를 플롯으로 차용했습니다.


이기적이고 오만한 주인공 필(남자 주인공/빌 머레이 분).

전국 방송의 앵커도 아닌 지역 방송국의 웨더맨입니다.

우리와 많이 다르지 않죠? 조금 유명한 정도와 약간의 셀럽인 건 다른가요?

'오늘'은 내키는 대로 막살면서도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이율배반적이 인물이지만 그의 미래는 암담할 뿐이라는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습니다.

얄밉지만 악하지는 않은 소소한 인물입니다.


그런 주인공이 덜컥 하루의 루프에 갇혀버리죠.

당연히 못 믿습니다. 거듭거듭 확인을 하고는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현실과 타협을 시도합니다.

본능에 충실한 시간들로 하루를 채웁니다.

이성 유혹 하기. 작은 동네의 여자들을 유혹하고 엔조이를 하다가 슬슬 실증을 느낍니다. 쾌락은 더 큰 쾌락을 부를 뿐이지요.

마지막 대상인 방송국 PD 리타(여자 주인공/앤디 맥도웰 분)를 유혹하는 과정에서 사랑에 빠집니다.

이런저런 기술로는 도무지 넘어오지 않는 여자입니다.

필은 그녀를 알아갈수록 사랑을 느낍니다..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지요.

필은 갇힌 시간 속에서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내일이 없는 삶. 절망을 느낍니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자 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음도 이 루프 안에선 허용되지 않는군요.죽음으로 이 반복 지옥을 끝내지도 못합니다. 지칩니다.


차분히 현실과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받아들이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책을 읽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필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성장을 하니, 타인들의 삶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작은 단순하고 작습니다.

유일하게 `나`만 기억하는 `오늘`과 영원히 오지 않는 '내일'은 그가 무엇을 하건 책임질 일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처음에는 쾌락을 추구하기 좋은 조건이었지만, 이제는 그의 이 하루 속에서만큼은 누구의 죽음과 불행도 보고 싶지 않다는 방향으로 변합니다.

친구에게 보험을 잔뜩 들어주고, 아이의 사고를 막아주고, 늙은 노숙자의 배를 부르게 해 주고 마침내 임종을 지키는 일로 자신의 하루를 채웁니다.


돕고 구하고 즐거움을 주는 어느 완벽한 하루가 이뤄집니다.

많은 타인들의 작은 행복을 돕는 그의 진심과 행동은 `인정`으로 돌아옵니다.

최고의 `인정`인 리타의 사랑을 얻으며 그의 완벽한 하루가 저뭅니다.


그리고 아침.

"Today is tomorrow!"

필의 대사입니다.


지금 하는 자신의 일은 꿈꾸는 전국방송에서의 화려한 미래의 일에 비하면 너무 하찮았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못나고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성에 차지 않는 오늘 하루는 되는대로 낭비했습니다.

멋진 미래의 그 날이 오면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필은 지금껏 그렇게 살았지요.


루프 속에서 그의 관점이 바뀌고, 해석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었습니다.

지루하고 그날이 그날 같던 일상을 새롭게 경험합니다.

이제는 속속들이 알아서 더 좋아진 사람들이 이웃이고 동료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고 완벽하게 해 낼 수 있게 된 그의 일은, 더 이상 시답잖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으며 그녀의 마음도 얻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사랑하는 이의 인정을 받는 뿌듯한 하루의 경험은 벅찬 기쁨의 감정을 꼬리표로 달고 그의 기억에 촘촘히 새겨집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내일'이라는 이 하루는 시속 10Km로 천천히 흐를 겁니다.

충분히 음미하며 행복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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