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구멍, 똥구멍

#1. 나는 왜 쓰는가 (브런치 오디세이)

by 수필버거

몇 해 전이다.

장미꽃이 필 무렵 사업이 망했다. 몇 년의 안감힘은 끝을 유예하는 무용한 노력이 돼버렸다. 원망을 견디고, 욕을 받았다. 자괴와 후회의 시간을 버텼다. 박살난 마음을 다시 잇는 데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다시 시작한 일은 크기가 줄었고, 나눠하던 일을 혼자 해내야 했다. 여전히 절뚝이는 마음은 버겁고 혼자 하는 일은 고됐다.


이듬해 벚꽃이 흩날릴 즈음 심장이 멎었다. 공황장애에 오래 시달린 몸에 과로까지 보탰더니 마침내 사달이 났다. 코마에서 깨어날 확률은 2%가 안되고, 의식이 돌아와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확률은 그보다 더 낮다는 의사 말에 아내는 큰 아이를 붙들고 엉엉 울었다고 한다. 아직 어린 아들 셋을 생각하고, 빈 통장을 생각했으리라.

십여 일 후 겨우 의식을 찾고, 산소호흡기를 떼고도 횡설수설하는 날을 또 보름쯤 이어갔다고 후에 들었다.

초여름에 퇴원했다. 기억이 드문드문 사라졌다. 생각은 파편으로만 가능했다. 이 생각과 저 생각을 잇지 못했다.


아침마다 걸었다. 살아야 했고 기억을 살려야 했고 파편적인 생각을 합쳐야 했다. 집에서 30분쯤 걸어가면 편의점이 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며 휴대폰 메모장에 생각나는 대로 썼다.

죽음의 경험은 여운이 길다. 사회적으로 한 번, 신체적으로 한 번 겪으니 이런 일이 내 삶에서 유일할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은 푸념을 썼고, 다음 날은 다짐과 희망을, 그다음 날은 욕을 썼다. 혹시 내가 사라지면 남겨질 이들을 위한 글도 썼다.

몸을 살리려 나선 산책길의 메모장은 내 마음의 콧구멍이었고 똥구멍이었다. 그 시간 동안 숨을 쉬고 배설을 했다. 쓰면서 거친 날들을 견뎠다.



그때부터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대한 마음이 점점 자라서 욕망이 되었던 게.

아무거나 더 쓰고 싶었다. 기록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무엇이든.

엑셀을 켜고 거래처 명단을 썼다. 특징도 썼다. 빚도 쓰고 받을 돈도 썼다. 기록 같지만 내겐 쓰기였다.

아이들에게 남기는 글도 짧게 몇 개 썼다. 또 있을지도 모를 내 부재를 대비하는 마음으로.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 사업을 위해서도 썼다. 지금 내 발 밑을 가늠하고, 내 손에 쥔 것을 살피고, 갈 길을 내다보는 건조하고 짧은 글을 썼다. 자책과 후회도 시간에 마모되어 안을 수 있었고 쓸 수 있었다.


쓰는 날이 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랐다. 살고자 하는 마음은 글쓰기의 욕심을 키웠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글 쓰는 사람이 돼도 좋을 것 같았다. 되짚어 보니 몇 년을 드문드문 쓰면서 숨을 쉬었다.

상황이 키운 도피로서의 욕망일까? 글 쓰는 사람이 되는 건 느닷없는 욕심만으로 가능할까?

아닌 것 같다.


어떤 열망은, 아니 감정은 너무 닮아서 구분이 쉽지 않다. 성공하고 싶은 열망과 단지 패배가 두려운 감정은 닮아 보인다. 다 타버릴 때까지 파이팅하게 되지만 뿌리가 다름은 나중에 알게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물러나고 버틸 지점을 구별하지 못해 치명상을 입기도 한다.

성실과 안감힘은 닮았다

지금 이 열망을 잘 살펴야 낭패를 피할 것 같다.


질문을 해보자. 질문은 대면이다. 깊게 길게 보면 뿌리가 보이겠지.

나는 왜 쓰고 싶은가? 지금을 모면하기 위해, 견디기 위해, 대비하기 위해서만인가.

질문은 욕망을 투시한다. 욕망으로 포장된 그 속의 무엇을 보게 한다.

단순한 답이 보일 수도, 추구해야 할 목적이 보일 수도 있겠다.


내 안으로 들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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