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도 먼 국민학교에 입학했지만, 이사를 몇 번 하면서 집과 학교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학교가 파하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는 1시간여의 하굣길이 무거워서 딴짓하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학원도 과외도 귀하던 시절이라 오후의 시간은 늘 남아돌았다. 심심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무료함을 잘 견디지 못한다. 마당에서 강아지와 놀고, 숙제를 해도 오후의 햇살은 좀 더 눕고 약해지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붉었다. 나는 느슨한 햇살을 뺨으로 맞으며 멍하니 앉아있는 날이 많았다.
문득 읽고 싶어 졌다. 만화책을 보고, 삼성당 문고를 읽었다. 새소년, 어깨동무, 소년중앙도 읽었다. 읽을거리가 떨어지면, 상표도 읽고 제품설명서도 읽었다. 경증의 활자중독. 집에는 더 읽을 게 없었다. 동네 만화방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기다렸다가 새로운 회차가 나오는 만화책이 있었고, 무협지가 있었다. 만화책은 기다리다 지칠 때쯤 다음 편이 나왔다. 타이밍이 안 맞으면 또 기다려야 내 손에 쥔다. 그렇게 만난 고행석, 허영만, 이상무, 이현세는 내 영웅이었다. 무협지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세 번째 선택지는 소설이다. 성인용이 많았지만, 만화방 주인아저씨는 개의치 않았다. 김성종을 만났다. 추리소설. 읽다가 밤을 새우는 경험을 처음 해봤다. 몬테크리스토 백작과는 결이 달랐다. 신세계. 그리고 김홍신도 만났고 최인호, 박범신도 만났다.
책은 문이었다. 읽는 동안 체험하듯 반응하는 내 몸이 내용을 실감 나게 해 줬다. 문만 열면 우주로 도시로 섬으로 갈 수 있었다. 무료함 따위는 사라진 세상. 오롯한 내 세상이었다. 가슴이 뛰다가 쫄아들고 뿌듯해지며 웅장 해지는 세상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일까? 어떻게 하면 이런 책과 만화를 쓰고 그릴 수 있나. 감탄했고 존경했다. 만화가와 소설가가 멋져 보였다.
내 세상을 창조하고 싶었다. 모르면 쉬워 보인다.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5학년, 6학년 무렵엔 바빴다. 내용을 구상하여 조악한 내 세상을 쓰고 그렸다. 열 장을 넘긴 건 없었다. 완결의 경험은 없지만 시도는 제법 많이 했다. 그 게 재밌어서, 그 길고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견뎠다. 국민학교 졸업을 하고선 잊었다. 호작질을 많이 했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만 남긴 채.
왜 쓰고 싶을까라는 질문을 물고 며칠을 지냈다. 내 속에 어린아이가 보였다. 고개를 책에 처박고 앉아서 읽고 있는 아이. 작은 책상에 앉아서 연필로 그리고 쓰는 볼이 빨갛게 상기된 아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는 많은 것들은 그때 잉태되었을 게다.
하필 이때, 몸과 마음이 피폐한 지금 나타나서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내 첫 꿈이라 불러도 좋겠다. 먼지를 켜켜이 뒤집어쓰고 깊이깊이 방치돼 있었구나. 작은 세상을 창조하고 싶은 아이, 쓰고 싶은 아이였구나, 나는. 이제야 봤구나. 내 인생의 늦은 오후에. 해가 뉘엿한 지금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