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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육화 축조】


대부분 인생과 삶을 경영, 또는 운영이라고 하며 살아가는 일이라 허기와 허무가 존재하고 고민이 있다는 뜻이고 이로부터 방황의 길은 선택을 요구받게 된다. 행이든 불행이든 결정을 하며 목적을 세우고 죽는 날까지 가는 것이기에 결국, 생과 삶의 문제는 얼마나 지혜롭고 고통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자기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의 귀결된다.


문학에 심취되고 학문에 도취 되어 연구에 몰두하며 글을 쓰는 사람들도 문학은 인격의 수용성, 사상의 정신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접신(接神)을 가지고 있어야 깊이가 넘치는 글이 된다고들 어느 교수는 말을 한다.

그렇다,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공감하는 말이다.     


내 자그만 서재에서 이산 저산을 바라보며 시간 지나는 줄 모르면서 글을 쓰다 보면 어느새 어제의 그 시간에 노을이 넘어가는 뒷자락이 여운으로 남기고 사라지곤 하는 것이 반복적 일상이다.

이별과 작별의 풍광과 아름다움을 만나는 기쁨 속에서 어김없이 뇌리에 가득해지는 사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라지곤 하는 것이 필자의 일상이 되었다.     

삶의 끝에 그려지는 나의 풍경화의 여백일지는 모르나 제법 조석으로 산책을 하는 일이 호사라면 호사일 것 같다.

사실 철학과 인간의 도(道) 정신개념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어느 대학병원에서 35년을 근무한 필자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

또 나는 무엇을 하면서 끝을 맺을 것인가의 상상을 하고는 한다. 소망을 그리곤 했던 것이 사실로 다가와 도시를 떠나 별들이 말하는 시골에 내려와 마음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내실을 더욱 다져 독자가 원하는 글을 그리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더욱 나갈 수 있도록 가열 차게 칼럼을 쓰고 시평을 쓰고 시대적 현실을 시와 수필로 그려내는 것이 나의 소명이 아닌가 자각하며 앞으로도 그렇게 낮은 자세로 임할 것이지만-


하긴 망설임이나 조바심은 정서와 느림의 미학으로 언제나 사전 뒷자리에 있어야 하지만 인간이란 모두 어떤 행동을 할 때 맨 앞자리에 놓고 생각하는 경향을 쉽게 불식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불렉홀(Black Hole) 항성의 붕괴처럼 어둠이고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무(無)의 상태에서 멋스러운 눈을 갖는다는 것은 지난(至難)하고 난제(難題)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서서히 내려놓으면서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며 더디게 가는 시간을 쪼갤 필요 없이 행동이 가는 대로 올리는 수확에 재미를 알고 주저주저의 마음으로 칼을 들이대고 무작정 잘라 버릴 것 같은 천길 단애의 두려움조차 없어지는 일에서 비로소 마음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고 보기에 현실에 적응하면서 자아의 길을 가고 싶을 뿐이나 글을 쓰는 나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왜 그런가 하면 글쟁이는 글을 쓰고 글로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왜곡된 것을 방관하고 현실에 이끌려 다닌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산속에 조용히 죽은 듯이 기거하고 있지만, 요즘은 반도체, IT, AI, 시대이기에 세상 돌아가는 일을 한눈에 볼 수 있기에 글을 쓰기에 시국과 정세를 진단 판단할 수가 있고 세계가 초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바지춤에 있는 휴대폰을 보지 않고는 세상 이치를 알 수가 없고 또 눈이 그쪽으로 가는 것은 아마도 보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불안함이라 할 수 있겠다.

공정 정의 상식이 바탕을 이루는 현실이라면 모를까?

서로가 이중잣대와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상대를 보는 현실에 어찌 두고 볼 수가 있겠는가?

보라, 선관위 사건, 돈 봉투 사건, 등 고정 간첩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니 참으로 기가막히지 않는가?                

지금 세계정세와 지구촌은 하나로 연결되어 한치 앞을 모르게 급변하고 있고 초를 다투는 이 시대에 서로가 단합하고 하나가 되어 달려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 무슨 해괘망칙한 일인가?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면 잘하는 것은 박수와 희망의 길로 인도하며 국민을 위로하고 이끌어주며 잘못하고 있다면 정서적, 객관적으로 올바른 판단으로 정도를 가라고 하는 지침을 주는 것이 옳은 일이지 무슨 떼거리로 몰려 개딸이니, 펜덤이니 하며 이 정부가 망해야 한다는 식으로 저주를 퍼붓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묻고 싶다.


언제나 공정, 정의,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데는 의견이 없어야 하지만 남북으로 갈라진 현재도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민주노총 간부가 간첩이라는 데에는 기막힌 노릇이다.

북한이 그렇게  좋고 추종한다면 북한으로 가서 살면 될 것 아닌가?

참으로 이런 이율배반이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지금 세상은 아우성이 정답인 것 같고 저마다 떠들고 내 말이 옳고 상대방 말은 그르다는 말에서 이제는 그런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좋을지는 모르나 배고픈 시절에 자라온 필자는 절대 아니올시다이다.


아직도 각종 언론이나 종편들이 날마다 단독이니 특보이니 하며 하루라도 특종이 없으면 안되는 그런 나날만 쫓고 있는 듯하여 외면으로 차라리 영일(零日)을 찾는다



단독, 특보라면 언어대로 특보라 하여 정작 그 타령을 들여다보면 이미 지나간 아니 아무것도 아닌 하잖은 단독이라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다만 상대방의 상대방들이 포장을 덧씌우고 가짜뉴스를 생산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젠 그런 말들의 성찬이 이젠 거추장스러워 아예 채널을 돌리고 만다.     

어찌 이사회가 반으로 갈라져 적개심으로 내 편 아니면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지 만시지탄인 것만 같아 너무도 아쉽다.

별것도 아닌 것을 반복하다 보면 무언가 사실인 양 둔갑술로 변하여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이번엔 잘해주겠지 하던 기대와 실망이 앞장서고 자기만의 박수가 연일 이어지면서 반대편의 주장은 천하의 지옥에나 들어가 화형을 당해도 싸다는 복수심의 발로가 이글거리는 것 같아 염려스럽기만 하다.

웬 놈의 원수가 그리 많으며 적개심의 전쟁터에 휴전조차 없는 이 사회의 통곡을 신은 듣고 있는지 -


직무유기를 일삼는 신의 표정에 찬물을 끼얹어야 할 노릇이 아닌가.

반대 아닌 반대만 일삼는 일에 이제는 분연히 일어나 사회의 안정을 세울 때이다.

불의에는 법대로 잘한 일에는 박수를 보내는 일이야말로 정서적 건강한 사회인 것이다.      

정말 정서의 불랙홀이다. 아무것도 없다 보이지 않는다. 바람도 없고 산도 없고 오로지 어둠의 깊이에서 살아야 하는 의무감 밖에 달리 없음을 뉴스 속에만 가득하다.

이런 현상에서 골라 먹는 백성들의 위장은 소화불량으로 탈이 났고 고칠 수 있는 제동 장치나 의사가 없다는 부재의 갈망이 어성성이다.

그래도 백성들은 희망을 찾아야 하고 길을 만들어야 하고 신념을 일으켜 세 불을 켜야만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 자정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마지막 절망에 이르면 되돌아보는 인간의 지혜를 믿을 뿐이다.

그 지혜는 엇일까?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은 지팡이가 있어야 하고 귀먹은 벙어리에게는 보청기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정서의 불을 켜는 일은 한 줄의 책을 읽고 자기를 돌아보는 샘물을 퍼올려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약하다. 현대인은 강하고 억세고 사나운 정서의 충격파를 던지지 않으면 꿈쩍도 안하는 심성이 굳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쓰레기장에 던져지면 아우성이 된다.

질서를 회복하는 일은 말의 언어를 옳게 세우는 일이라면 길은 한가지인 것이다.

문학의 장이다. 물론 소설은 현실을 묘사나 설명하는 주 임무이기 때문에 말의 질서와는 크게 상관이 없다. 다시 말하면 소설은 현실을 보여주고 반영하는 풍경화의 제시나 표현이 고작이기 때문에 그 대답의 요지는 시(詩)라야 하는 것이다.     

시(詩)를 앞세우는 이유는 꼬장한 단정함을 요구하는 특성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말이 바로 서면 정신이 바로 서고 정신이 곧추서면 행동이 바로 서는 것이다.

때문에 말은 곧 질서의 대열을 갖고 예의범절 회복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주장을 너무 고지식하고 낡은 레코드판을 돌리는 것과 같은 신선미 없음을 자인한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신선미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유성이나 번개가 아니다.     

백성이 사는 땅은 새로운 것이 없는 오로지 과거의 반복이 새롭다는 의식을 가질 뿐이지

새로운 것은 존재치 않고 과거의 것을 다시 보는 시선의 문제가 있다.

아버지의 삶은 자식이 거부한다 해도 이미 자식의 내부에는 아버지의 인자(因子)가 가득하고 언젠가 아버지의 행동이나 철학이 돌출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왜 그런가 하면 생리적인 DNA가 면면히 내부에 흐르고 있어 거부한다 해도 거부할 수 없는 과학적인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는 있고 변화 또한 당연한 것이다.     

말의 성찬에 기울이다 보면 이성이 마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른바 설득당하는 뜻이고 이런 현상은 정서를 잃어버리는 결과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자유 구가하는 이성의 일탈이 심하고 정도가 없는 혼란이 가중되는 느낌을 많이 는다.


젊은이나 나이 많은 어른들의 의식 대결이 이데올로기에 침식당하는 불행이 깊다는 것도 말의 성찬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서 마비에서 원인을 찾는다면 좋은 글 한 구절이 구원의 메시지로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

갈증에는 물의 한 모금이 필요한 것이지 말의 꼬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이 씨가 되는 말이 있듯이 말 장사꾼들의 분석이나 변명을 듣노라니 참으로 비열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입을 닫고 눈만 굴려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같아 너무 우울하다.

이 사회에 덫에 걸린 거미줄이 된 것같은 현실에 사회에  국민만이 안고가는 이런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아 정말 안쓰럽다.

이런 허송의 세월 속에서 손님 같이만 느껴지며 나만이 전원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고 아프다.     

2023.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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