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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ego를 보는 것】

『그리움의 손짓』

   

나를 바라보는 방법은 불가능한 일이라 한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만약 거울이라는 도구가 없다면 나의 발견은 영원한 미지수의 숙제로 남아 있을 것이지만 나르시스의 신화는 나를 발견함으로부터 비극의 문이 열리는 일에는 또 다른 인간의 숙제가 생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거울을 볼수록 스스로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는 가의 질문에 답을 마련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자화상』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늘 당혹감에 침잠(沈潛)하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 곁을 따라다니는 사람”의 그림자는 항상 낯선 모습처럼 따라다니지만 정작 자기의 그림자를 정면으로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하면 나를 만났다 싶으면 다시 멀어지는 일정한 거리로 존재하는 일이 자화상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도 그리움이라는 언어에 아름답게 꾸미고 나를 찾는 하루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사실 나를 찾는 자화상의 소득이 아름다운 삶에 목적이 있음을 명확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사실 그리움이라는 말에는 늘 아득하고 깊은 의미의 파문이 숨어 있다. 명확하지도 않은-

마치 파스텔 톤이나 수묵화 같은 흐린 농담(濃淡)으로 처리되는 의식에는 시의 특징인 <ambiguyty>가 시적 의무에 충실한 감동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시는 하나 더하기는 하나가 아닌 둘이요. 셋으로 의미를 구축할 때 좋은 시 독자에게 어필해야만 시라는 이름이 헌 증 되기 때문이다.        
 詩를 일별(一瞥)한다면 시인의 특징이 언어로 주입되기에,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언어로 그의 신념이나 사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집을 읽으면 대체로 언어의 빈도에 따라 그 시인의 정신적인 추이를 가늠할 수가 있다.
 문학은 곧 그 사람의 정신에 나타나는 고백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꾸미고 치장하고 분칠 한다 해서 궁극에는 시인의 생각을 시적인 은유나 알레고리 혹은 상징으로 포장하였지만, 본질은 고백이라는 형태를 보이는 심리적인 표현이다.
 

자기 자신의 시에 초기에는 계절이나 바람에 의해 시어에 의지해서 과거와 미래 혹은 현재의 풍자를 시도해 보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은 촉매의 징검다리라 할까?
 그러나 내 생각의 본질은 그리움이 요동을 친다.

점차 나이를 먹어 가면서 이런 생각이 시나, 수필, 칼럼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웃음이 저절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한다.

왜 그런가 하니 내 과거가 지금까지 질펀한 추문이 아니라 인간적인 애(愛)라 할까?

겉만 번 지른 그런 허세, 허풍, 허영에만 눈이 멀었었다.

돌아보면 그런 것 같다. 아마도 여린 마음에 그리움의 막연한 동경이 결핍 증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한다.
 
 愛가 결핍되어 앓던 날
 풍경의 풍광이 마냥  
 
 어두워
 다시 지나 돌아보면
 
 그것이 눈물겨운 이름
 아름다운 꽃이었네
 
 저 멀리 돌아간다면
 풍경화로 보듬는 향기
 
 자아에 숨겨
 혼자 펴보는 추억
 
 바람난 그리움으로
 오롯이 젖고 있네
 
 
  <내 그리움>


 
 1연의 내용만으로 보면 첫사랑이나 2번째 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 같은 뉘앙스가 될 것이기에 나는 그런 일에 겉만 번지르한 액션만 취했지 실속은 없었다.

기실 자유스러운 상상의 길이 없었다면 드라이함도 기준만 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내 그리움은 막연하고 또한 특별하게 붙잡을 뼈대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실질적 사랑에 빠지거나 발을 담가본 적이 없었기에 상상의 벌판만 왕래하거나 삶의 목표를 그리움의 궁극으로 생각한다면 내 자유 아니 벌판에 풀어놓은 망아지 같아 이상에 머무르는 안개 같은 막연한 상상의 그리움이 일정한 대상이 토착화된 것들이 아니었기에 때로는 정치의 곧음을 나타내는 정의감일 수도 있고 이루지 못한 꿈들의 파편들이 아니었겠나 하는 반추를 해보는 것이다.          

내 어린 나날은 정도와 의무감 때론 의리에 유달리 생각과 일편단심에 가진 날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실행에 옮긴 것보다 에고의 길에 남다른 비판의 칼날이 번뜩이는 직장 생활이었고 사회 기준의 옳음에 판단 이단적인 사고를 유지했기에 대부분 교과서에 정의만을 외우고 있을 뿐 -

현실은 무기력하고 침묵으로 지나는 경우가 태반임을 잘 알고 있으나 문학비평에도 그런 현상이 사회 일반적 생활이 다름이 없다고 할까?
 이는 옳은 평가와 바라보기가 안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침묵하기보다는 실행에 옮기고 비판하는 기능이 좀 더 예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성미 때문에 늘 이단적인 혹은 외곽에 머무르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비판의 기능은 외로움이고 고독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후회한 적이 없다.
 고개 숙이고 엎드려 사느니 고개 들고 사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태생적 성질머리가 그러니 어찌하랴.     


 그리운 기다림 어찌하오리까


소리 없이 오는 춘풍은

경칩 바람에 꽃이 온다 조바심인데

우수에 문 열어 놓은 사념 줄기는

텅 빈 마음 오리무중이라

고독은 창조의 의미인데

의식의 공허는 늘 따라오는 향기에

마음 닿아 봄 햇살조차 그저 그리움이고 아픔이라

그대 그리운 기다림은 아려옴만 전부이고

고백의 전서 그리운 기다림에

냉기의 갈증만 앞을 가리네

언제까지 미로를 헤매는 일이

전부인데 눈물겨운

이 그리움

이 기다림 어찌하면 좋을까나?     

그립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이고 외롭다는 것은 마음 즉 ego 문제이기에-

사실 그리움은 막연한 생각이지만 가가이 있음이 아닌 얼마의 거리가 존재할 때 생각이 집중되는 현상이라고 말들을 한다.      

“텅 빈 마음 오리무중이라” 텅 빈 마음을 오리무중이라 하는 것은 관심이 전혀 두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지만 대상에 대한 관심도가 모으면 생각이 외골수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리움은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안으로 파고드는 이유를 만들고 고백이 누선(淚腺)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외로움, 그리움은 고독의 다른 이름이지만 곧 자기를 알기 위한 일로 외로움의 길은 열리게 되기에 자기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외로움이라는 상황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고독과 그리움을 느끼면서 이를 지혜로 넘어가는 방법을 찾을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결과물이 결국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대한 그리움의 진원지인지도 모르겠다. 성공적인 결과보다는 불만족의 경우가 더 많은 삶의 세월을 지탱해 오면서 자랑거리 하나 없지만 말이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을수록 그리움은 더욱 증폭한다.

내 글의 표현은 결국은 삶의 도정을 나타내는 언어의 포장인 셈이다.

단지, 이성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것보다는 생의 길에 이루지 못한 아득한 일들이 사실 그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떨까,라는 유추의 생각에 이를 때, 더욱 간절한 상념의 길이 열리고 그 길로 가고 싶은 막연한 동경이 발동된다.

이런 그리움의 진원은 늘 애간장으로 내 마음을 끌고 어디로 가곤 또 오곤 한다.      

아울러 시는 자기의 거울을 만드는 일이기에 때로는 고백하고 감추면서 미감(美感)을 찾아 나서는 나그네의 여정이다.

더불어 삶을 숙고하면서 자아 정립의 방법으로 시를 쓰는 일이 곧 지혜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시는 내 운명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무작정 따라가면서 불러보는 그리움의 표정은 선하고 따스함을 갈구하는 마음이 전부라면 감정은 나이를 먹지 않은 특징이 있는 것 같아 애달파하게 밀려오는 고독은 왜 일까인지는 아직도 (?) 물음표이다.
 내 그리움의 최종 종착지는 애매하고 붙잡을 수 없는 "아득함"에서 내 특성이 잘 나타난다. 또한, 이루지 못한 것이 많을수록 발동되는 그리움은 사랑 같은 의상으로 시의 표정을 만들고 있는 내가 어느 때는 철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면 실소(失笑)가 떠돌며 애고(Ego)의 오리무중임이 그리움의 종착점이 아닐까 생각하며 에필로그 한다.
 
 
  2023. 07. 0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몽유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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