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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풍광 따라 행장을 꾸려라]

{1. 소리 나는 시의 소리}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시의 모습을 찾는다면 묘연(渺然)한 행로가 전부일 것이다. 왜냐하면 시의 근원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인가를 추적하는 일은 암담하고 절망에 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탄생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과 같을 것이라면 같은 비유가 아닐까?

시의 본질에 들어가는 일 또한 지난한 일이며 가설에서 출발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환청이나 환각을 갖는 일일 것이며 또는 환한 꽃길을 타고 오는 반가운 손님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의 행로는 언제나 미지(未知)의 순간에 나타났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을 것이기에 -

사실적으로 의식 속에 담기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처럼 시라는 존재는 미지의 거리에서 다시 미지로 떠도는 그 속성을 포착하는 일이 될지 모르겠다.     

같이 시는 우주 즉 삼라만상을 떠도는 행성의 운명과 닮은 것이고 인간의 감성을 울리고 떠나는 바람과 같은 모습을 연상하는 이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와 시인의 관계는 언제나 대척점에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인의 마음을 늘 초조하게 만드는 일이 역설적으로 보면 시를 창작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겠다.      

시인마다 개성이 틀리고 성격, 삶의 과정, 과거 현재 등이 모두 다르기에 언어를 운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문패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정지(停止)해서 살아가는 사람과 떠도는 유랑에서 의미를 건지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항상 새로운 영지를 탐색하는 인자와 지배적인 정서와 언어의 조합에서 남들보다는 해체적인 정서로 의미를 만드는 방법을 선택해야만 하는 시인이 미래의 지배적인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바다와 바다는 길이 길로 이어지는 오로지 흔적만 남고 이동한다.

시인의 의식 또한 바다에서 이동하는 정서

목표가 있건 없건 시심을 바다에서 창작을 불러오는 시인이나 아니면 자연에서 불러오는 시인 등 하늘과 하늘을 채우면서 삶의 인자(因子)를 구성하는 의미 부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 풍광의 소리}     


시각 즉 보이는 것은 실재의 풍광과 이면(裏面)의 풍경이 있다.

시는 내면의 풍광을 보여줄 때, 시인의 사상과 깊이 있는 철학을 만나게 된다. 시가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내면을 감동으로 전달할 때, 긴 생명을 소유하는 시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예) 1개 나무의 외관을 바라보는 일은 초보적인 시선이라면 나무로 승화되는 생명력, 혹은 생명력의 의미와 상관관계의 여러 생각들 혹은 나무 아래에서 쉼을 얻고 간 사람들의 표정, 나무 아래에 꿈꾸었던 사랑의 이미지와 나무를 매개로 저쪽의 세계를 유추하는 것은 나무의 내면을 통찰했을 때 나오는 사상이다.     

이를 mind’s eye-

시의 깊이는 이 심안(心眼)을 나타냈을 때 심사(深思)한 의미로 나타난다면 시인의 시선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는 길을 확보하는 기교이고 기법이라 하겠다.

시는 풍경과 풍광을 보면서 이를 승화시키고 비틀고 그때의 감정을 은유로 감싸는 것이다.

실재 풍경과 내면의 풍경이 여러 방법으로 드러날 때 의식의 창(窓)을 여러 각도로 바라보는 정서의 여유가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사실 시는 실재의 풍광 혹은 내면의 풍광이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드러날 때 상상력의 풍요를 거론하게 되는 것이다.     

풍광을 많이 그리는 시인이라면 의식의 창과 상상의 여유가 있다고 한다.

시는 응축의 예술이고 산문은 리얼리티를 나타내는 방법에서 사고의 유연성은 시의 적합성이고 과학적인 정치(情致)함을 산문의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사뿐사뿐 눈 내이 내려

마음 젖던 날

순백으로 꾸며진 또 하나의 들

가슴으로 무너져 눈물 주는 강

... 중략...                     

                    <눈 내리는 강> 졸 시


강을 깨끗함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보인다. 시인은 대상과 일체화를 이루는 반영의 거울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맑은 마음에는 맑은 강물이 보이고 흐린 마음에는 흐린 강물이 흐르기 때문이다.      

시는 포장지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에 아름다움을 담는 정서라면 감동을 줄 것이다.

풍광의 소리가 들리는 것은 바로 시인이기 때문이다.

소리를 들을 줄 알고 시를 그릴 수 있다면 그 정신 가치는 부여하는 의미에 풍족한 만족을 줄 것이다.

시에는 언어의 절제와 탄력이 비상하는 듯 간결하고 축약적이어야 한다.

비유의 적절성과 사물을 대면하는 시선이 일체화를 이루면서 다양함을 소화하는 변용(變容)하는 재미를 더할 때 더욱 인상적인 시의 숲을 조성하는 것일 것이다.      

자유정신의 가치는 원형을 내포한 정서의 진원지이자 시의 출발과 귀향(歸鄕)을 함께하는 동시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저(基底) 위에서 풍요의 정서가 회귀의 정서로 나타나면서 다시 그려지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시는 풍광을 연출하면서 내면과 외면의 조화가 어울린다면 시의 표정을 관리하게 되며 휴머니즘을 주조로 삶의 가파름을 넘어가는 마음이 여러 개로 나타나며 계절의 순환에서 시의 모습이 향기로 승화하려는 발상이 꿈과 연결되는 시적 묘미가 단단한 탄력적이고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언제나 행장을 꾸려 산천을 두루 살피면서 배우고 익히고 섭렵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희생정신으로 더욱 정신 가치를 위해 많은 책과 더불어 언어의 소화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실 앞에 반응하는 민감한 의식의 촉수를 가지고 생활화는 길이 되어야 하며 이를 통하여 인간의 사랑 그리고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스펙트럼 -

휴머니즘의 정서를 갖고 아름다운 풍광의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에필로그 한다.     


2023. 10. 26.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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