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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사랑과 의식의 변증]

{정서의 소재}

시란 의식의 토로를 거쳐 나오는 정서의 질서 현장이다.

[대중문화평론가/이승섭시인]

왜냐하면 시인 본인의 체험이 바탕을 이루면서 상상의 조역을 받을 때, 일정한 질서의 규범을 갖추면서 시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삶의 방안을 구가하려고 의미와 가치로 혼신을 발휘하려 하는 것이다.      

간혹 성공한 사람도 있고 도로(徒勞)에 그치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명망을 얻거나 하는 것은 그 반대인 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새로움을 찾아 자기만의 성을 구축하려는 일상의 노력이 가상한 것이지 유명의 대열과는 별로 의미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유명하다는 말은 부풀어 오른 거품현상이지 자신의 참된 의미와는 무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도 그렇다. 

생이라는 고해의 바다에서 오로지 자기의 정화(淨化) 혹은 순수한 수양의 도구일 때, 시의 가치는 참된 자기와의 만남 혹은 그런 표정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시를 쓰는 일은 진실 혹은 순수와 대화를 나누는 일에 헌정되는 것이다.      

자기 삶의 고뇌와 고통 신산(辛酸)한 생의 이름들이 모여 순화(醇化)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시는 아름다움을 손짓하는 가락으로 탄생될 수 있는 역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는 헌신과 사랑 삶에 대한 성찰 혹은 자기를 돌아보는 닦음의 소재가 의식의 통로를 통해서 가락을 형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나 고향의 정서 또한 시의 원형을 이루는 표정에도 따스한 햇살이 다가드는 것이다.   

  

2. 주는 모습      


낮은 자세로 흐르는 물은 속성이 겸손하다

거스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달관의 높은 경지를 점했다는 의미도 되지만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지배보다는 헌신이고 주는 것이라 교만보다는 겸손을 앞세울 때, 사랑의 마음이 깃들게 되고 사랑의 넓이는 따스함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Van Gogh가 파리 시대에 그린 『Lee Souliers』라는 작품을 보았다. 

한 켤레의 농부 화에서 서럽게 살고 힘들게 산 농부의 슬픈 삶에 고달픔과 생의 아픔이 낡았고 지친 표현의 구두에는 충분히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Gogh가 그린 『La Chaise De Vincent』 또한 딱딱하고 비뚤어진 의자 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을 유추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이런 일의 작품은 작가의 모든 체험과 상상력은 작품과 밀접한 상관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늘 발을 껴안으며 감싸는

신발은 가다가 쓰러져도

자기 몸 다 닳고 헤어져도 

심술이나 고통 하나 없이

언제나 나를 지킨다.   

   

                  <신발> -졸 시-     


시인이 시집을 출간할 때나 상재할 때 의도적으로 작품의 순서를 배열하는 일은 독자의 첫인상을 휘어잡으려는 발상에서 맨 앞자리에 작품은 눈여겨본다. 

왜 그런가 하니 인간이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의상은 누구나 다르다. 자기와 어울린다는 의상은 본인이 다양하게 꾸미고 멋을 부린다.

누구나 이런 일은 같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발이란 더욱 그렇다. 신발이 깨끗하고 깔끔하다면 그 사람의 첫인상이 멋지게 보이고 각인이 된다.     

앞에서 고흐가 그린 농부 화에서 삶의 고단함과 서글픈 농부의 등식처럼, 시인과 신발은 비교가치로 연결된다. 

봉사와 헌신을 기본 목표로 살아가는 일이 삶의 방편이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은 때로 고독하다. 

왜 그런가 하니 이타행(利他行)은 자기를 희생하는 바탕 위에서만 비로소 성립되는 Eros 적인 희생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태어나 인연 맺은 날부터 

지금까지 무안 사랑 에너지를 주었건만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온 세상 지구를 주고 빛과 삼라만상을

주었건만 그 의미도 모르고

깨닫지 못하는 우매한 우리     


             <우매한 인간들> -졸 시-     


사랑은 대상과 대상의 교감이 성립될 때, 비로소 빛을 발휘하는 이치처럼 헌신과 봉사에도 그런 교감은 필요할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방적 사랑은 짝사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에게 드리는 기도조차도 응답을 기다리는 신도의 자세처럼 봉사에도 일정한 대가는 보여야 하는 것이다. 시인의 햇빛이 일방적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함이 없이 마냥 받고 돌아서는 일에 서운함이 있을 것이다. 

몰이해는 실망과 고단함이 따라올 것이지만 사랑을 줄 때, 아가페적인 무한의 사랑이 고귀할 수 있다면, 일방적으로 받아서가 아니라 주었을 때 비로소 빛나는 가치로 돌아서는 이유를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사랑은           


시인은 사물을 바라보며 사랑을 숙고하면서 또 찾아 나서고 그것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신명을 바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곧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고 자연을 끌고 와서 인간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대신하는 사람일 때, 시는 고귀한 가치로 표정을 갖게 된다. 대부분 시인은 시적 사고와 정서가 사랑의 이미지로 채워져 있다.

말을 바꾸면 인간을 사랑하고 자연과 대상을 하나로 묶어 평화로운 땅을 만들 때 시의 가치는 공고한 성주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목표를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는 체험의 요소와 상상력 그리고 창조력, 그리고 의미와 신념이 교직(交織) 되면서 한 편의 시를 만나는 일이기에 결국 생각의 방향과 의지가 시화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면 사랑의 감수성이 많은 이유는 시인 정서의 모두가 그런 방향으로 설정되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왜 그런가 하면 시는 시인의 내적 고백이고, 이 고백은 진실의 함량이 우선하기 때문에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갈 시간

그리 많지 않게 남아 

무조건 행복하게 살라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며 살라

행복하고 사랑하라 영원히-     


               <사랑> -졸 시-     


‘살라’ ‘하라’의 형태로 명령하게 되면 독자가 위압당하는 논조이다.

그리고 독선적인 함정이 될 수도 있지만 합리적이고 타당하다면 오히려 감동의 작동 원리 즉 감동의 누선(淚腺)을 자극할 것이다.   

시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인 진리와 정직 등을 외면해선 아니 된다.

우리 인간들 세계에서는 누구나 해당될 수 있는 삼인칭 복수의 지시적인 시어에서 사랑을 이룩한다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등식이 전개된다. 

‘하라’와 ‘살라’의 명령어가 거북하게 느끼지 않는 이유는 사랑이 곧 역설의 기교가 되기 때문이다.   

       

4. 고향자연부모     


인간의 근본은 뿌리를 아는 일일 것이다.

이 출발은 부모로부터 시작하고 다시 고향의 이미지로 전개될 때 내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물론 친구도 있고 추억의 이름이 더해질 때 삶은 풍윤(豐潤) 해질 수 있게 된다. 작고하신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지상정 당연지사일 것이다.           


아버지 뵙고 싶습니다.

세상이 이리 변해도 

소자 마음은 아직도 곁에 있습니다.

세상살이 버거워도 아버지 곁에 있다

생각하며 버티며 살고 있습니다.     


                 <부모> -졸 시-     


부모는 자식의 반면교사가 될 때 교육이라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엄격하고 강인함을 요구하는 아버지는 때로 외로운 모습이 될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들은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작고하신 아버지가 옆에 계심을 믿으면서 현실을 이겨나가는 것이 아버지요. 동시에 자식인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5. 정신 가치의 탑        


사랑은 헌신에서 나오며 헌신은 더 큰길을 안내하는 길이 만들어진다면 시는 순수와 의식 가치가 남다른 것이다. 이는 우리 삶의 질료(質料)가 되며 평생을 지속하는 삶의 에너지로 작동되는 것이다.     

생을 지속하는 데는 정답은 없지만 자기 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절제와 균형을 갖추는 삶에의 모습이 투명해야 한다는 조건 앞에서 시인은 당당한 것이다. 사회 불합리에는 몸살을 앓고 옳은 것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자세가 환하게 비추어지며 시의 정신 가치가 원천이면서 삶의 지표로 작용하는 건강한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에필로그 하련다.     


2020. 10. 31.     


대중문화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시인  

[필자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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