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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의 문학 척도]

[순환의 법칙]

인간이 살아가는 길은 삼라만상에 순환의 법칙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대중문화평론가/칼럼리스트/이승섭]

인간의 이치가 자연의 이치와 상치(相馳)된다면 결국 우리네는 도태되는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는 일이란 비우고 채우고 번갈아 교차하면서 비움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는 다시 비워야 하는 것이다. 이는 순환의 법칙이기 때문에 “노자 4장에는 ”도는 비어있어 이를 써도 언제나 차지 않고, 깊어서 만물의 종인 것 같다고 했기에 노자의 철학은 도의 철학이라는 뜻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연은 노자의 철학에 있어 근본의 불변 이치를 설파하려는 것은 깊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

자연에는 있음과 없음의 구분이 아니라 있고 없음에는 이치가 윤회의 돌고 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채움과 비움의 문학의 척도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먹어야 살고 또 배설의 순서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먹을 것을 찾아 일상을 비화하는 일이 삶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서 비우고 채움, 있음을 충족하는 일이 먹어서 채우는 요인이 배고픔일 것이고 배고픔을 채우면 다시 배설의 순서가 비움을 재촉하게 된다. 있음과 없음, 채우고 있음은 우리 신체조직에서도 자연의 이치와 닮음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당연한 진리일 것이다. 인간의 이치가 자연의 이치와 상치(相馳)되면 결국 인간은 도태(淘汰)라는 운명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채움과 배설과 비움이라는 3단계의 법칙은 자연의 질서 개념이고 이 질서를 따르는 일은 곧 자연의 순환에 일조하는 인간의 자연 이치라 보는 것이다.          

사실 내가 쓰는 글은 이치도 채움의 방법이고 곧 비움이 있을 때 새로운 것과 부딪치는 일이 진행형이 되는 이유가 곧 삶의 원리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문명의 발상도 그렇고 삶의 윤택을 보좌하는 경제 논리도 이 3단계의 이치를 어떻게 원활하게 진행하는가는 곧 자연의 법칙 속에 존재의 형태를 맞춤으로 이끄는 이유가 될 것이고 심지어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영역은 궁극으로 3단계의 과정이 하드웨어라면 각기에 따른 소프트웨어는 분기(分岐)하면서 다양성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소프트웨어에 운용해서 지혜가 수반된다는 점이다. 막힘이 없이 자연스러울 때 지혜의 정점을 확보하게 된다는 뜻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부족하다고 판단할 때 그 부족만큼은 채우려는 판단과 넘침이 있을 때 그 상황을 판단하는 결과에서 얼마나 비울 것인가를 아는 일은 지혜의 항목이며 판단도 결국은 지혜의 수순에 들어갈 뿐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창작에서 많은 것을 창작한다면 어떨까?


여기서 필자 서상(敍上)의 논리는 모순 같은 이유를 거론하게 된다.

얼마 나의 기준은 늘 인간의 편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이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거역을 의미할 때, 재앙을 불러오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적정의 기준은 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너무”라는 말을 덧붙이면 욕망이 발동되는 것이고 욕망의 검은 구름은 늘 자기 자신을 삼키는 순서가 엄정(嚴正)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기서 비움과 채움의 배설과 비움의 단계가 채움의 단계에서 순환의 기능이 배설될 때, 자연스러운 비움이 다가들고 반대로 비움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배설과 채움의 길이 연리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란 노자 5장 중에 [“비었어도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욱 나온다.”] 는 필자가 많은 창작을 합리화하는 적당의 예로 들고 싶다.


왜 그런가 하면 일반기준에서 확실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두고 신명이라 부르고 싶으며 집중화의 광기라는 말로 치부하고 싶다.

여기서 노자도덕경 35강 [천지지간 기 유탁약호호이불굴동이유출] “동이 유출”은 필자가 속도감 빠르게 진행하는 예술창작의 다작에서의 합리로 울타리라는 말이다.          

사실 일반기준으로 볼 때 간판의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논지를 다소 이탈하는 것 같지만 여성의 음부인 곡신(穀神)의 창조에는 얼마 동안의 무한이라는 기준에 이를 수도 있겠다.


예를 들자면 남녀가 결혼하여 3명의 아이를 생산하는 여성과 13명을 생산하는 때도 있다면, 후자는 확실히 곡신(穀神)의 왕성한 경우가 될 뿐이며 그전 단계는 화합의 남녀가 이룬 성과라는 뜻이다.     

예술가는 곡신(穀神)의 생산 기능과 같은 점에서 과작과 다작의 이름을 분간하는 경우로 진행되기에 연혜(演兮) 즉 깊다.라는 어둠에 창조의 근본으로 이끄는 이른바 칼 융이 강조한 무의식의 깊이를 방문하면 신기한 면을 발굴하는 원천에 도달하는 재미가 있게 된다. 칼 융은 『잊는다』를 우리에게 있어서 정상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진술했다.

잊음은 비우기라는 뜻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창작의 비움은 곧 채움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을 첨가할 이유가 다가드는 듯하다.        


  

시평 한 권을 교정 정하고 내 곁을 떠나보낸 후

텅 빈 가슴에 요동치는 물살이 시원섭섭한데

밀물로 다가왔던 파도가 갑자기 멈춘 정적 앞에

허전함이 밀려와 잠시 먼 산을 바라보며

망연한 생각의 파노라마가 스치면서 다시

무엇인가를 재촉하는 바람결에 들리는 소리를

기다리는 출산 후의 그 느낌은 허전과 기쁨도 이럴까.

여전히 정적이 휘감는 허기에 배가 고프니

이 어이할꼬             

  

                         <채우고 난 뒤 비움의 자리> 졸 시     

     

배설은 채움의 전제라면 시인이나 작가는 무한 허기를 채우기 위해 탐색의 눈을 두리번거리며 날마다 빛나는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곧 자연의 이치에서 소프트웨어라는 점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일이 합리적임을 변명하는 절차가 있을 뿐


이는 개인의 개성이 남다르다는 뜻으로 돌리면 꾸미는 말이 될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 겸손도 필요할 줄 모른다. 그러나 부지런히 많은 글을 쓰는 일은 결코 비생산적인 사실은 아닐 것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으며 나 자신을 자위하면서 맛이나 멋이나 예술이라 칭한다 해도 채움을 위해서 비움을 바른 것에서 다가오는 감수성 또한 예술이라는 이름을 헌정할 수 있는 이유는 궁극으로 예술의 심미가 추구하는 본질 즉 바르고 비우고 채우고 하는 순수하고 깨끗함을 미감으로 자극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은 당연하지 않을까 하며 에필로그 한다.      

    

2023. 12.      


[대중문화 평론가/칼럼니스트/이승섭]

[이승섭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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