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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글의 인격]

{혼(魂)이 넘치는 글의 인격}

[금요 저널 주필/칼럼니스트/

이승섭 시인]



대부분 글은 인격이라고들 한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작가들의 글 면면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의 특성이 숨어있고 개성의 혼까지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 글이 위장의 수법을 쓸 뿐만 아니라 감추고 숨기는 일을 문장 기교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곧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을 나타내는 엄숙한 선고이기 때문에 결코 스스로의 설정한 궤도를 이탈하는 법이 없다는 점에서 글은 숙명적이 아닐까?

요즘 용어로 직설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돌직구라는 성격이 있는가 하면 요리조리 숨기면서 목표에 이르려는 은폐적인 성격도 있다.


결국은 자기표현이고 자기주장일 뿐 다른 목적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현상은 숙명인가 아니면 환경의 변화에 의해 추종(追從)하는 가의 여부도 점검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면으로 볼 때 둘의 속성을 결합한 제3의 독립된 특성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고 이러다 보면 셋을 결합한 종합형의 이름도 등장할 수 있다면 한 가지로 재단하는 일은 점점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것은 글은 결국 개성이다 라는 간판에는 양보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도독 놈이 쓴 글은 도둑의 심리가 들어있고 선비가 쓴 글은 선비의 양심과 정신이 침윤(浸潤)되어 있기에 거부할 수 없는 명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진단을 어떤 방법이나 어떤 경로를 쫓아 본질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고 그를 증명하는 가의 여부가 있을 뿐이라면 방법론의 중요성도 글을 분석하는 데는 필요한 덕목이라 할 것이다.


글이 머리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가슴에서 나오는가의 문제도 있다. 전자에는 세상을 살면서 보고 경험해 보면서 느낀 것을 여과 없이 나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자기화가 되지 못한 흠결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후자는 치열성이나 어떤 문제의 근본 앞에 고민하고 사고한 후에 자기화하는 체험의 복합에서 나온 결과물이기 때문에 한층 무게를 갖고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머리로 짜내는 글에는 편견과 이리저리 줏대 없이 흐르는 물결일 수도 있으며 또 표절 등의 라인을 넘어갈 때 사고를 칠 수 있는 경우가 흔하다. 요즘 같은 경우는 표절을 넘어 베껴 쓰는 이른바 저작권 위반 등으로 얼마나 피해를 보며 본의 아니게 몇 줄 옮기다 크나큰 손해를 보는 경우가 다반사가 아닌가.


이는 지적 과시 즉 폐단 틱의 함정에 빠져 난하고 조잡할 뿐만 아니라 흐름에 일정 성을 일탈한 경우도 있어 곰보 자국처럼 매끈하지 못한 모양이 된다.

작금에 흔한 저작권 위반의 경우 이런 잔머리 굴리는 일과 무관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글이라는 것, 문학이라는 것은 언제나 따뜻한 이름으로 찾아가는 고향이며 안식처인 것이다.  이는 본질이고 원형의 숨소리가 깃들어 있는 공간이기에 소중하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글과 문학을 이용해서 지위를 탐하거나 사다리로 사용하려는 불순한 의도는 항상 꾸미고 위장한다는 점에서 명품과는 상당히 거리를 갖고 있지만 독자는 이런 안목을 갖는 일에는 비교적 구분의 방법을 모르고 있을 경우가 흔하다.



때문에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나오는 일이 흔하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소설이나 혹은 수필의 경우 구분 없이 머리로 쓰는 글의 이름은 항상 요란하기 때문이다.

요란하면 주목을 받고 요란하면 좋은가라는 등식이 설립하는 얕은 사고의 이름에는 명운이 길지 못하는 특성도 함께 따르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글의 이름에는 조급증이 들어있고 분칠하고 꾸미는 문장의 속 깊이에는 진리가 우왕좌왕하는 모양이 보이지만 독자의 눈에 감식안이 발동할 여유가 없을 만큼 지능적일 수도 있음은 머리로 진전하는 행로일 것이기에 구분의 모호성도 따라올 것이다.


문학의 글은 자기 자신의 얼굴이자 정신이고 영혼의 안식처가 된다.

혼(魂)이 없다는 글은 이미 껍질이고 가화(假花) 일 때 비록 한때의 명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사라지는 바람의 뒷자락이 허무만 남기는-

옛사람은 간장 병마개라는 말로 치부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조금 늦게 가더라도 진실 게임은 언젠가 빛을 발하는 것이 진리의 이름이라면 이를 믿고 글을 쓰고 문학을 한다는 것은 때로 지루하고 인내를 요구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선택의 문제일 때 괴로울 것이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마음을 바치는 언덕이 항상 높아 보이는 것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은 심리적인 현상이 말하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쓰는 PC 앞에서 급한 성격, 소재가 떠오르면 바로 옮기는 성격, 끝까지 글을 마쳐야 하는 조급증, 글을 쓰면서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병행하여 진행하는 성격, 글을 쓰다 막히면 차를 마시는 양, 또 막히면 밖으로 나가 호수로 향하여 물과 자연의 오연함, 오묘함을 바라보는 사이 다시 돌아오는 일이 일상일 때, 나만의 톡특한 우스꽝스러운 모양에서 무슨 즐거움이 탄생하려는가?

기다림의 언덕이 아주 멀리 있을 뿐이다.


사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돌아보는 눈에는 아름다움으로 수채화를 그리는 일이 연결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은 기다림의 진리를 알 때만이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예술이 필요한 소이(所以) 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돌아보면 내 삶의 계곡도 관광객이 없는 그림-

그러나 사람 팔자 뒤웅박이라 또 어찌 알겠는가?

결국 기다림을 갖고 함께 동행하는 길목에서 여전히 차이가 있지만 목적에 오르면 기쁨을 함께 나누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지론이며 내 속도전을 느림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8월의 첫날 내게 다가오는 이름이다.


2022. 08. 01.


금요 저널 주필/칼럼니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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