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알고리즘과 메카니즘의 반응】

{문학의 기초적  인지와 작동의 원리}


인간은 기초적인 인지 자료라 하면 알고리즘이라 할 것이고 메카니즘은 작동하는 원리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초와 유기반응은 어떤 경우에든 반응과 인지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살아야 하기 에 때문에 적응을 위한 함수가 즉 자기 반응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가 병이 생겨 병원에 Admission(입원)해서 수술 같은 것을 받게 되면 Dr가 하는 일은 반응을 알아본다. 1차적 수순이 바로 반응이며 다음 순으로 넘어간다. 세상만사가 순서가 있듯이

모두가 이런 적용의 원리로서 작동될 때, 복잡한 인지기능에 따라 대응을 하며 시작을 하는 것이다. 행동심리학 연구는 하지는 않았지만 조연병원에서 근무를 한바 어깨 너머로 짐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반응의 통계라고 하면 인가사의 일은 이런 일이관지의 사례가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동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상대가 알 수가 없는 것, 비록 잘못을 했어도 반복의 행동이 온다면  결국에는 부딪침이 되는 것이다. 즉 잘못을 인지하고 고지의 일이 있을 때 즉각 반응하는 일은 다음 수순을 생략하는 간편이 되는 것이다.



필자는 시골에 내려와 귀촌을 하여 가끔 시골에서만 발생하는 일들과 자주 마주하곤 한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다른 논에 물을 막고 자기의 논에 물을 받으면 심각하게 서로 다툼이 생기고는 한다. 이런 자기 아집과 이기주의가 시골에서는 심심찮게 보고 산다.

물론 한발 양보하면 되지만 1년 농사를 잘 지어야 하기 때문에 시기가 지나면 수확이 적게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경우가 자주 일어나 앞 뒤 집에서 서로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회적 동물이라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상 기류를 보면서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도시이나 시골이나 모두가 같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일이 심각하게 발생 되었을 때 아무런 반응이 없이 지나가는 경우와 반응하는 경우는 다음에도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필자 옆 밭이 하나 있는데 6월 지금쯤 우사에서 쇠똥을 잔뜩 받아놓고 몇 날 지나니 그야말로 냄새가 진동을 하여 문을 열 수 없는 지경의 극심한 공해를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시골의 풍경이라 하지만 사람이란 인내의 한계가 있는 법 이것을 놓고 확연히 다른 차원의 행동이기 때문에 필자가 살며시 그분을 만나 사정을 하고 나니 그제 서야 밭을 갈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위의 반복을 그냥 넘기게 되면 모든 사람이 피해가 갈 것이라는 것을 인지를 못해서이다. 아마 도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소송이 걸리지 않았을까?



서로가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것을 알고리즘과 메카니즘의 반응에서 인지하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아무튼 존재는 존재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이 반응을 기회가 제공되며 반복의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필자는 합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인지를 주무로서 미리 피해를 막을 수 있고 예방의 조치가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 존재를 너무 드러낸다면 반감을 가질 수 있으나 또 존재를 너무 감추다보면 무시당하는 경우에 이른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둘의 사이에서 오고가는 고민을 소화 시키는 일로  일상이 지난다.



물론 살아간다는 일에 있어 당연히 피힐 길 없는 수순의 방법이고 행동이라는 점에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이라 -

사는 것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것이 정확한 답안이라는 제시는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신들의 말조차도 해석의 여지가 많은 말로 포장되기 때문에 서로 다툼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자기의 위치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말의 지리한 설전이 나타난다.

예로 어느 경전이 수학적인 답안으로 이루어진다면 존립의 근거가 모호할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여지가 많은 개입의 자리가 있는 것이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신은 인간의 언어로 전달하는 모순이기 때문에 끝없는 분쟁과 싸움의 빌미를 제공한 신의 실수라고 해야겠다.

침묵이 금이라면 결국은 인간의 모순에 대한 변명이고 이 변명은 결국 다기한 갈래로 말의 포장을 일삼고 있다는 점에서  신은 지속적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신은 인간의 곁을 떠나면 이미 존재가 없다는 것도 인간의 야비하고 교활한 행동양식이다. 신을 만든 인간의 지혜가 신의 발목에 잡혀 함정에 빠지는 영악한 우둔도 물론이지만 -

결국 나는 인간관계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체념의 문을 열어 놓고 살아야겠다.

오는 사람은 반기며 가는 사람은 원망하지 않는 일로 정리되고 내 모습 그대로 하루하루

희망을 섞어 역사를 쓰면서 지내야겠다.

사실 젊은 날의 몰랐던 일들이 나이가 익어갈수록 알게 되는 상대의 차이가 왜 그렇게 크게 보이는지를 생각하면 사는 일에 해답이 없는 모호한 숲이 고독하게 보이는지 ...


있어야 할 것은 점차 없어지는 것으로 변하는 것도 필연으로 느끼고 사는 것이 불편한 일이

있을지라도 또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이치가 당연한 것이라면 편리를 쫒아 가는 것이 보상이라면 보상이라고 해야겠다. 알고리즘과 메카니즘의 반응일지라도 ...

 

2022. 05. 09.


금요저널 주필/칼럼리스트/

문화연구위원/이승섭시인

[필자의 선조 이조년 석비 앞에서]

[채수영 박사 추도식 행사]

[이승섭 칼럼집]{공정, 정의 사색의 길}

[이승섭 시집, 때론 눈물이 길을 묻는다]

작가의 이전글 [사물과 변형의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